엘도니아 제국의 황혼이 짙게 드리운 밤, 류카는 아마루와 함께 달그림자 저택의 높다란 문을 통과했다. 웅장한 아치형 문 위로는 고대 마법 문양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평소라면 제국의 지성들이 모여 마법과 연금술을 논하며 밤늦도록 빛을 밝혔을 저택은, 오늘따라 침묵과 어둠에 잠겨 있었다. 마치 저택 자체가 거대한 비명이라도 집어삼킨 듯.
“류카, 벌써부터 으스스한데요.” 아마루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의 발걸음은 류카의 차분한 보폭과 달리 다소 불안정했다. “별들의 춤을 연구하는 마법사의 저택이 아니라, 유령이 나올 것 같아요.”
류카는 대답 없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저택의 외벽을 훑었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밤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유령도 무언가를 남긴다, 아마루. 그림자든, 속삭임이든.” 그의 목소리에는 불필요한 감정의 동요가 없었다.
저택 안은 이미 혼란의 도가니였다. 은은한 마법등이 비추는 복도에는 경비병들이 우왕좌왕하고, 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 웅성거렸다. 그 중심에는 덩치 큰 경비대장 카이렌이 붉어진 얼굴로 서 있었다. 그의 갑옷은 희미한 마법 광채를 띠고 있었지만, 그의 표정은 불안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류카 님, 어서 오십시오!” 카이렌이 그들을 발견하고 다급히 다가왔다. 그의 목소리에는 초조함이 뚝뚝 묻어났다. “정말 곤란한 상황입니다. 카시안 경께서… 살해당하셨습니다.”
류카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을 뿐, 그의 표정에는 어떤 동요도 없었다. 마치 당연한 사실을 듣는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밀실 살인이라 들었습니다만.”
“그렇습니다! 서재, ‘별의 도서관’에서요.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창문도 마법으로 봉인되어 있었습니다. 외부 침입의 흔적은 전혀 없습니다. 자살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는 건, 경의 손에 들린 단검 때문입니다.” 카이렌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 단검은… 경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경의 손은 너무나 깨끗했습니다. 마치… 단검을 잡고만 있었던 것처럼요.”
류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내해주시죠.”
별의 도서관은 이름 그대로 은하수를 연상케 하는 웅장한 서재였다. 돔형 천장에는 마법으로 수놓아진 별자리들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고, 벽면 가득 고대 문서와 마법 서적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책장 사이사이에는 신비로운 유물들이 유리장 안에 전시되어 있었고, 공기 중에는 낡은 종이와 마법의 먼지 냄새가 섞여 있었다. 엘도니아 제국의 지성이 응축된 공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방의 중앙, 거대한 원형 테이블 옆에 카시안 경이 쓰러져 있었다. 가슴팍에 박힌 은빛 단검은 섬세한 조각이 새겨져 있었으나, 그 칼날은 유독 비정하게 번뜩였다. 그의 주변에는 쏟아진 잉크병과 찢겨진 양피지들이 흩어져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미처 끝내지 못한 마법 서클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보시다시피… 문은 안에서 단단히 잠겨 있었고, 강력한 보호 마법까지 걸려 있었습니다.” 카이렌이 한숨을 쉬었다. “창문은 모두 강철 창살로 막혀 있고, 마법 보호막도 이중으로 쳐져 있습니다. 밖에서 깨뜨리는 건 불가능합니다. 카시안 경은 이 방을 ‘절대 침범할 수 없는 요새’라 불렀습니다.”
류카는 천천히 방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의 발걸음은 조용했고, 시선은 모든 것을 담으려 했다. 그는 먼저 문으로 다가갔다. 고대 마법 문양이 새겨진 육중한 문은 안에서 걸린 빗장이 굳건히 내려져 있었다. 류카는 손가락으로 문양을 따라 쓸어보았다. 그의 손끝에서 희미한 마력이 느껴지는 듯했다. “보호 마법… 흠, 카시안 경 본인의 마력이 깃들어 있군요. 강력합니다.”
“그렇습니다. 경이 직접 설정한 마법이라, 경이 해제하지 않으면 풀 수 없다고 합니다.” 저택의 오랜 집사 세바스티안이 떨리는 목소리로 설명했다. 늙은 집사의 얼굴에는 슬픔과 함께 설명할 수 없는 피로감이 엿보였다. 그의 눈은 침통함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류카는 그 밑에서 언뜻 스치는 무언가를 읽어낸 듯했다.
류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창문으로 향했다. 두꺼운 강철 창살과 그 뒤로 번쩍이는 마법 보호막. “이건… 굳이 마법으로 열 필요도 없었겠군요. 물리적인 침입이 불가능해 보입니다. 설사 마법적인 침입을 시도했더라도, 이 마법 방어막은 제국의 어떤 대마법사라도 쉽사리 뚫을 수 없을 겁니다.”
그는 시선을 천천히 옮겨 천장의 돔형 지붕을 올려다보았다. 별자리 그림이 아름답게 펼쳐진 그곳에는, 한동안 시선을 고정했다.
“천장에도 특이한 점은 없습니다, 류카 님.” 카이렌이 조급하게 말했다. “저희가 다 확인했습니다. 환기구 외에는 어떤 통로도 없습니다.”
류카는 대답 대신 허리를 굽혀 카시안 경의 시신을 살펴보았다. 단정하게 정리된 옷, 편안한 얼굴. 마치 잠든 듯한 모습. 하지만 심장에 박힌 단검만이 그 평화를 산산이 부수고 있었다. 류카는 단검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은빛 칼날 끝에는 핏방울 하나 맺혀 있지 않았다. “이 단검… 누가 보더라도 기념품에 가깝군요. 살상용으로는 지나치게 섬세합니다. 순수한 마력이 주입되어 있긴 하지만, 살인에 특화된 형태는 아닙니다.”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아마루가 류카의 옆에 바싹 다가서며 말했다. “칼날도 너무 깨끗하고, 손잡이의 옥 장식은 너무 미끄러워서 제대로 힘을 주기도 힘들 것 같아요. 이걸로 어떻게 경의 갑옷을 뚫었을까요?”
류카는 단검을 아마루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확실히 그렇군. 그렇다면… 진정한 흉기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아니면… 이 단검이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는 걸까?” 그의 눈빛이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그는 다시 방을 둘러보았다. 흩어진 양피지 조각들. 쏟아진 잉크병. 그리고 카시안 경의 손에서 발견된, 이제는 류카의 손에 들린 단검. 그의 시선은 멈추지 않고, 바닥의 작은 먼지 하나, 책장 모서리의 미세한 흠집 하나까지 놓치지 않았다.
문득, 류카의 눈이 바닥의 한 점에 멈췄다. 책상 아래, 잉크가 쏟아져 말라붙은 흔적 근처에, 미세하게 반짝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손가락으로 그것을 집어 올렸다. 손톱보다도 작은, 무지갯빛이 감도는 비늘 조각. 마치 살아있는 보석처럼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게 뭔가요?” 아마루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들여다보았다. “너무 아름다운 비늘이네요.”
“드래곤 피쉬의 비늘… 엘도니아 제국의 깊은 마법 호수에서만 서식하는 희귀한 물고기지. 이 저택과는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군.” 류카는 비늘을 작은 주머니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드래곤 피쉬는 마법적인 에너지를 흡수하고 발산하는 특이한 생명체였다.
그의 시선은 다시 천장으로 향했다. 별자리 그림이 그려진 돔형 천장. 그리고 그 중심에서 약간 비껴난 곳에, 육안으로는 거의 보이지 않는 희미한 마법의 잔류가 감지되었다. 류카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꿰뚫는 눈’에만 보이는, 푸른색의 미세한 흐름. ‘속박’의 마법. 하지만 시신이나 바닥이 아닌, 천장에?
“세바스티안, 카시안 경께서는 평소에 어떤 마법을 즐겨 사용하셨습니까?” 류카가 집사에게 물었다.
“주로 고대 학문에 관련된 마법을 연구하셨습니다. 물질 소환이나 변환 마법 같은 것은 경의 주특기가 아니었습니다. 경의 마법은 늘 온화하고 지적이었죠.” 세바스티안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떨렸지만, 그의 눈빛은 류카의 질문에 잠시 흔들리는 듯했다.
그렇다면 이 ‘속박’ 마법의 잔류는 카시안 경의 것이 아닐 확률이 높다. 그리고 이 비늘 조각. 드래곤 피쉬는 마법을 흡수하고 발산하는 특성이 있었으니, 이 비늘이 이곳에 남겨진 이유가 분명 있을 터였다.
류카는 천천히 방의 한가운데로 돌아왔다. 그의 눈빛은 깊은 호수처럼 고요했지만, 그 안에는 거대한 폭풍이 일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한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번에는 다른 무엇인가를 찾는 듯.
그리고 그의 시선은 돔형 천장의 가장 높은 곳, 별자리 그림의 정중앙에 닿았다. 그곳에는 작지만 분명하게, 마법으로 가려진 통풍구가 있었다. 그 통풍구의 닫힌 틈새 사이로, 아주 미세한 흠집 하나가 눈에 띄었다. 마치 무언가 얇고 단단한 것이 스쳐 지나간 듯한 자국.
류카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아마루, 자네는 이 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아마루는 곰곰이 생각했다. “음… 잠겨진 문? 아니면 피해자의 손에 들린 단검? 아니면… 이 알 수 없는 비늘?”
류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 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라진 진실과, 범인이 남긴 완벽한 환영이다.”
그의 눈은 다시 천장의 통풍구를 향했다. 그리고 그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 방은 ‘별의 도서관’이 아니라, ‘환영의 무대’였습니다. 카시안 경은 이곳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칼날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마루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경비병과 집사 세바스티안, 그리고 저택에 남아있던 부인 엘레나까지 모두 류카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엘레나 부인은 얼음처럼 차가운 미모를 하고 있었으나, 류카의 말에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는 듯했다.
“진범은 이미 이 방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그가 남긴 트릭은… 이 천장에 있습니다.” 류카는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카이렌 경비대장, 저 통풍구를 열어주십시오. 그리고… 조심하십시오. 아직 범인의 마법 잔류가 남아있을지도 모릅니다.”
류카는 차가운 눈빛으로 세바스티안 집사를 바라보았다.
“세바스티안 집사, 저택 내부에 혹시, 드래곤 피쉬를 키우는 연못이나 어항이 있습니까? 아니면, 드래곤 피쉬 가공품을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자가 있습니까? 드래곤 피쉬의 비늘은 희귀한 마법 촉매로 사용되기도 하죠.”
세바스티안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류카는 놓치지 않았다. 엘레나 부인의 시선 또한 세바스티안에게 향했다.
“그리고… 카시안 경의 유언장을 확인할 필요가 있겠군요. 특히 재산 상속에 관한 부분을요. 별의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었겠지요.”
류카의 마지막 말이 공간을 가득 채우자, 별의 도서관은 더욱 깊은 침묵에 잠겼다. 밀실 살인의 환영이, 조금씩 그 베일을 벗기 시작하고 있었다. 진정한 살인자는 어디에 있었으며, 그가 남긴 환영의 칼날은 무엇이었을까. 류카의 날카로운 시선은, 이제 그 모든 미스터리의 중심을 꿰뚫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