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아포칼립스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1화. 1304호의 침묵

밤이 깊었다. 정하윤은 낡은 스탠드 조명 아래에서 작업용 태블릿 펜을 놀리고 있었다. 고작 스무 평 남짓한 13층 아파트의 거실은 그녀의 작업실이자 생활 공간, 세상의 전부였다. 창밖으로는 희미한 도심의 불빛들이 흩뿌려져 있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오직 화면 속 알록달록한 디지털 드로잉에만 머물러 있었다. 늦은 밤, 적막한 공기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소리는 정전식 펜이 액정 위를 스치는 사각거림과 간간이 들려오는 키보드 자판 소리뿐이었다.

오랜 시간 같은 자세로 앉아있던 허리가 뻐근했다. 하윤은 가볍게 기지개를 켜며 어깨를 쭉 폈다. 목을 좌우로 돌리자 뚝, 뚝, 뼈 마디가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물이라도 마실까 싶어 잠시 펜을 내려놓으려는데, 그 순간이었다.

‘쿵.’

작고 둔탁한 소리. 마치 아래층에서 누가 무거운 물건을 바닥에 떨어뜨린 것 같은 소리였다. 하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시간에? 1204호에는 신혼부부가 살았는데, 보통 이 시간에는 조용했다. 육아에 지쳐 일찍 잠자리에 들거나, 아니면 둘만의 시간을 보내느라 바빴을 테니까.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다시 펜을 잡으려는 찰나, 이번에는 더 가까운 곳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투둑.’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커피잔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분명히 방금 전까지는 태블릿 바로 옆에 있었는데, 어느새 손가락 하나만큼 옆으로 밀려나 있었다. 하윤은 눈을 비볐다.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나? 혹은 지진인가? 그러나 진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커피잔만 제자리를 이탈했을 뿐이었다.

“내가 너무 피곤한가 보네.”

하윤은 중얼거리며 커피잔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아직 식지 않은 커피를 한 모금 홀짝였다. 씁쓸한 카페인 향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다시 작업에 집중하려던 순간, 시야 한구석에 있던 스탠드 조명이 깜빡였다. 한 번, 두 번. 마치 전구가 수명을 다한 것처럼 느리게 깜빡이다가 이내 다시 밝아졌다.

“…….”

이건 좀 이상했다. 분명 새 전구로 갈아 끼운 지 얼마 안 됐는데. 하윤은 괜히 조명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조명은 평소처럼 은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등골이 오싹했다. 이 오래된 아파트에 혼자 사는 것 자체가 익숙했지만, 이런 기이한 현상은 처음이었다. 하윤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귀를 기울였다. 복도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생활 소음, 가끔씩 위층에서 들리는 발자국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평범한 밤이었다. 그렇다면 방금 전의 일들은 전부 피로와 착각이 만들어낸 환상일까.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태블릿을 보는데, 이번에는 거실 한가운데에 놓인 작은 인테리어 화분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화분 옆에 놓여있던 작은 돌멩이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져 있었다.

‘똑.’

조용한 공간에서 또렷하게 울리는 작은 돌의 낙하음. 하윤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는데? 그녀는 화분 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흙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바닥에 홀로 놓인 돌멩이. 그리고 아직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는 화분의 잎사귀.

숨을 멈췄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느낌. 머릿속으로 온갖 합리적인 이유들을 찾아냈다. 고양이가 있었나? 아니, 난 고양이를 키우지 않는다. 바람? 창문은 닫혀 있었다. 지진? 역시 아무런 진동도 없었다.

하윤은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섰다.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다. 그녀는 화분 쪽으로 몇 걸음 다가갔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누구… 없어요?”

작게 중얼거렸지만, 목소리는 몹시 떨렸다. 대답은 없었다. 아니, 대답 대신 다른 것이 찾아왔다.

‘슥, 슥…….’

벽지 안쪽에서 들려오는 듯한 긁는 소리. 마치 손톱으로 석고보드를 긁어대는 듯한, 신경을 갉아먹는 불쾌한 소음이었다. 하윤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거실과 침실을 잇는 벽이었다. 소리는 일정하지 않았다. 잠시 멈췄다가 다시 시작되기를 반복했다. 마치 벽 안에 무언가 갇혀서 필사적으로 탈출하려는 듯이.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건 더 이상 피로 탓도, 착각 탓도 아니었다. 뭔가 *있었다*. 그녀의 아파트 안에, 혹은 벽 안에.

공포에 질린 하윤은 거실 중앙에 우두커니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둠이 짙게 깔린 방구석구석이 마치 살아있는 그림자처럼 느껴졌다. 문득, 거실 창문 밖으로 시선이 닿았다. 검은 밤하늘 아래, 멀리 다른 아파트의 불빛들이 점점이 박혀 있었다. 모두 평화로워 보이는 저곳들과 달리, 이 1304호 안은 비현실적인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덜컹!’

이번에는 싱크대 쪽에서 커다란 소리가 났다. 하윤은 비명을 지를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몸을 돌려 부엌 쪽을 바라보니, 컵을 건조시키는 식기 건조대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 위에는 접시 두어 개와 컵 몇 개가 엉망으로 흩어져 깨져 있었다. 방금 전까지 멀쩡하게 싱크대 위에 놓여있던 것이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하윤은 입을 틀어막았다. 몸이 덜덜 떨렸다. 눈앞에서 벌어진 명백한 물리적 현상. 누군가 의도적으로, 혹은 무언가 강제로 떨어뜨린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없었다.

거실의 공기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평소의 온기가 사라지고, 마치 냉동창고에 들어온 듯한 한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입김이 나올 것만 같았다. 시야가 흐릿해졌다.

그때, 하윤의 귀에 희미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가…….’
‘……와…….’

분명 누군가 속삭이는 소리였다. 아주 가까이에서. 하지만 알아들을 수 없는, 의미 없는 소리였다. 목소리는 낮고 탁했으며, 마치 모래알을 씹는 듯한 불쾌한 마찰음이 섞여 있었다. 하윤은 저절로 뒷걸음질 쳤다. 소리는 어느새 그녀의 바로 뒤, 그러니까 등 뒤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흐읍!”

하윤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삼키며 뒤를 돌아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빈 공간. 그러나 목덜미를 스치는 소름 끼치는 한기, 그리고 방금까지 바로 뒤에서 속삭이던 그 존재의 묵직한 압박감은 너무나도 생생했다.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이 아파트를 벗어나야 했다. 하윤은 현관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현관문이 그녀의 눈앞에서 *저절로* 쾅 하고 닫혔다.

말 그대로, 닫혔다.

방금 전까지 살짝 열려있던 문이,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강하게 밀린 것처럼, 굉음을 내며 닫힌 것이다. 문고리가 안쪽으로 살짝 돌아가며 잠기는 듯한 소리마저 들렸다.

하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빠르게 뛰었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 환상도 아니었다.

이건, 현실이었다.

그녀는 고장 난 인형처럼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어둠 속에서 벽을 긁는 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그 소리에 섞여, 문득,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희미한 울음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스쳤다. 마치 상처 입은 짐승이 내는 듯한, 혹은 인간의 것이 아닌 듯한… 기괴한 울음소리였다.

1304호는 이제 더 이상 그녀에게 안전한 안식처가 아니었다. 낯설고 섬뜩한 존재가, 보이지 않는 그림자가, 그녀의 공간을 침범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이제 막 시작된 재앙의 전조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