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막한 바람이 뼈를 에는 듯 스쳐 지나갔다. 잿빛 하늘 아래 펼쳐진 것은 끝없는 폐허였다. 한때는 번화했을 도시의 잔해가 거대한 무덤처럼 솟아 있었다. 부서진 고층 빌딩의 앙상한 철골 구조물은 마치 거대한 괴물의 뼈대 같았고, 길바닥에 뒹구는 삭아버린 차량들은 시간이 멈춘 듯 녹슨 채 침묵하고 있었다.
강후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찢어진 도포 자락이 바람에 펄럭였지만, 그의 눈빛은 꼿꼿했다. 며칠째 제대로 된 식량은 입에 대지도 못했지만, 그의 내면은 끓어오르는 불꽃처럼 뜨거웠다. 살아남아야 했다. 그것만이 유일한 목적이었다.
“젠장, 이놈의 세상엔 먹을 게 썩어 넘치는 폐기물뿐이군.”
강후는 발에 채인 부러진 금속 조각을 걷어찼다. 쨍그랑,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조각은 멀리 굴러갔다. 그의 등에는 낡고 녹슨 철검이 비스듬히 메어져 있었고, 손에는 돌을 깎아 만든 듯 투박한 단도가 들려 있었다.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위협에 대비하는 자세였다.
이곳은 ‘망각의 도시’라 불리는 곳이었다. 대재앙 이후 모든 것이 뒤바뀐 세상에서, 이곳은 가장 위험한 구역 중 하나로 손꼽혔다. 죽음의 기운이 지면에 스며들어 모든 생명체를 왜곡시키고, 비틀린 형상의 괴수들이 어둠 속에서 배회하는 곳.
강후는 반쯤 무너진 백화점 건물 안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들였다. 한때 명품으로 가득했을 진열장은 텅 비어 있었고, 썩어 문드러진 마네킹 팔 하나가 먼지 쌓인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코를 찌르는 곰팡이 냄새와 알 수 없는 비린내가 뒤섞여 역겨움을 유발했다.
“큭… 냄새 봐라.”
강후는 소매로 코를 막으며 깊숙이 들어갔다. 식수원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희망 때문이었다. 천장이 무너져 내린 중앙 홀을 지나 창고 쪽으로 향했다. 그때였다.
쉬이익-!
강후의 등골에 섬뜩한 한기가 스쳤다. 본능적인 감각이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그는 재빨리 몸을 웅크리며 옆에 쓰러진 기둥 뒤로 숨었다. 직후, 무언가 거대한 것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끄르르르… 컥…
짐승의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사람의 헐떡임 같기도 한 기괴한 소리. 강후는 숨을 죽였다. 기둥 틈새로 시선을 돌리자, 어둠 속에서 빛나는 붉은 눈 두 개가 보였다. 어둠에 익숙해지자, 거대한 형체가 서서히 드러났다.
그것은 늑대를 닮았지만, 훨씬 더 크고 흉측했다. 몸은 비늘로 뒤덮여 있었고, 등에서는 거대한 뼈 돌기들이 솟아 있었다. 앞발은 기형적으로 길고 날카로운 발톱이 돋아 있었으며, 입에서는 초록빛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비늘 늑대’라 불리는 변종 괴수였다. 그중에서도 이 정도로 거대한 것은 처음이었다.
‘망할… 하필 지금.’
강후는 이를 악물었다. 이미 여러 차례 비늘 늑대와 맞서 싸워봤지만, 저런 대형 개체는 위험천만했다. 단도 하나만으로는 역부족일 터였다. 그는 조용히 허리춤의 철검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비늘 늑대는 천천히 코를 킁킁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특유의 비린내가 강후가 숨은 곳으로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녀석의 붉은 눈이 강후가 숨은 기둥을 향했다.
콰앙!
강후가 움직이기도 전에, 비늘 늑대는 기둥을 향해 몸을 날렸다. 거대한 발톱이 시멘트 기둥을 산산조각 내며 파고들었다. 강후는 간발의 차이로 옆으로 굴러 몸을 피했다. 파편들이 비 오듯 쏟아졌다.
“크아아악!”
비늘 늑대가 포효하며 강후에게 달려들었다. 강후는 바닥에 박혀 있던 철근을 뽑아 휘두르며 철검을 뽑아 들었다. 녹슨 철검이 공기를 갈랐다.
파아앗!
강후의 몸이 마치 그림자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그의 내공이 발끝에 집중되자, 마치 바람처럼 비늘 늑대의 측면으로 파고들었다. ‘섬전보(閃電步)’! 대재앙 이전, 전해져 내려오던 무학의 정수를 모은 보법이었다.
“어디 덤벼라, 망할 괴물!”
강후는 철검을 비늘 늑대의 옆구리를 향해 휘둘렀다. 쩌억! 하는 소리와 함께 비늘이 부서지는 감촉이 손에 전해졌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철검은 비늘을 완전히 뚫지 못했고, 오히려 늑대가 옆으로 몸을 비틀며 강후를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우드득!
강후는 가까스로 검으로 늑대의 턱을 막았다. 엄청난 힘이 철검을 통해 팔로 전해졌다. 강후의 팔이 저릿했다. 늑대의 이빨은 철검을 긁으며 끔찍한 소리를 냈다. 초록빛 침이 철검에 떨어져 연기를 피웠다. 독성이었다.
강후는 이를 악물고 철검을 밀어냈다. 그 반동으로 몸을 뒤로 빼며 비늘 늑대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났다. 늑대는 멈추지 않고 꼬리를 휘둘렀다. 뼈 돌기가 박힌 꼬리가 콘크리트 벽을 때려 부수며 강후를 향했다.
콰르르릉!
강후는 몸을 굽혀 꼬리 아래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리고 늑대의 배를 향해 단도를 치켜들었다. 늑대의 배는 상대적으로 비늘이 얇았다.
“여기는 어떠냐!”
단도를 최대한 깊숙이 찔러 넣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끈적한 피가 솟구쳤다. 비늘 늑대가 고통스러운 울부짖음을 토해냈다.
“크아아아악!”
녀석은 미친 듯이 몸을 비틀며 강후를 떼어내려 했다. 강후는 단단히 단도를 부여잡고 늑대의 몸에 매달렸다. 늑대의 발톱이 바닥을 긁으며 그를 찢어발기려 했지만, 강후는 필사적으로 버텼다.
이때다! 강후는 몸에 남아있는 모든 내공을 단도에 집중했다. 단도가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파쇄(破碎)!”
강후는 단도를 옆으로 크게 찢어냈다. 늑대의 복부가 길게 찢어지며 내장이 쏟아져 나왔다.
털썩!
거대한 비늘 늑대가 바닥에 쓰러졌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경련하는 녀석의 모습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강후는 피범벅이 된 채 녀석의 위에서 내려왔다. 온몸의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그의 옆구리에는 늑대의 발톱에 긁힌 상처가 깊게 패어 있었다. 초록빛 침이 상처 주변의 살을 녹이고 있었다.
“젠장… 독이군.”
강후는 주저앉아 낡은 헝겊을 찢어 상처를 동여맸다. 고통이 온몸을 갉아먹는 듯했다. 하지만 살아남았다. 또 한 번,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것이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쓰러진 비늘 늑대를 바라봤다. 녀석의 눈은 아직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순간, 강후의 시선이 늑대의 목덜미에 닿았다.
그곳에는 늑대의 비늘과는 이질적인, 반짝이는 금속 조각이 박혀 있었다. 마치 펜던트 조각 같기도 하고, 어떤 장치의 일부 같기도 한 그것. 늑대의 비늘에 파묻혀 잘 보이지 않던 것이, 녀석이 죽어가며 힘없이 늘어진 몸 때문에 이제야 드러난 것이었다.
강후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 금속 조각을 빼냈다. 손톱만 한 크기의 육각형 조각이었다. 낡고 오래되었지만, 표면에 새겨진 문양은 또렷했다. 마치 어떤 상징 같기도 하고, 글자 같기도 한 기묘한 문양이었다.
문양의 정중앙에는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그 안에서 희미하지만 따스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늑대의 독으로 얼어붙어가던 강후의 손이 그 빛에 닿자, 순간 따뜻한 기운이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상처 부위의 통증이 아주 미미하게나마 가라앉는 듯했다.
이것은… 대체 무엇이지?
강후는 의아한 표정으로 금속 조각을 쥐었다. 이 황폐한 세상에서, 빛을 내는 물건은 극히 드물었다. 게다가 이 따스한 기운이라니. 늑대의 몸에 박혀 괴수와 함께 오랜 시간을 보냈음에도, 그 안의 빛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문득, 강후는 오래전 재앙 이전의 이야기를 들었던 것을 떠올렸다. 세상이 무너지기 전, ‘영물(靈物)’이라 불리는 신비로운 힘을 가진 유물들이 존재했다는 전설. 과연 이것이 그런 유물 중 하나일까?
그때, 저 멀리, 폐허의 끝자락에서 또 다른 붉은 빛이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이번에는 한두 개가 아니었다. 마치 수십 개의 촛불처럼,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깜빡이는 붉은 눈동자들.
비늘 늑대 무리였다. 그것도, 이전의 늑대보다 훨씬 많고, 더욱 거대한 그림자들이었다.
강후는 본능적으로 그들이 무엇을 쫓아왔는지 깨달았다. 죽은 동족의 핏냄새를 맡고 몰려온 것이다. 그는 황급히 주머니에 금속 조각을 쑤셔 넣고 녹슨 철검을 다시 고쳐 잡았다.
“하… 겨우 살아났다고 생각했는데.”
입에서는 쓴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그의 눈빛은 오히려 더욱 강렬하게 타올랐다.
강후는 피 묻은 손으로 상처를 움켜쥐고, 망각의 도시를 집어삼키는 어둠 속으로 다시 몸을 던졌다. 붉은 눈동자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새로운 희망의 조각을 움켜쥔 채.
강후의 필사적인 도피가 다시 시작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