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의 붉은 돔 지붕은 한때 찬란한 마법의 정수를 상징했다. 하지만 지금은 핏빛 석양을 등지고 기괴하게 웅크린 거대한 해골처럼 보였다. 돔 곳곳에 박힌 창문들은 검은 눈구멍처럼 텅 비어 있었고, 그 안에서 새어 나오는 것은 더 이상 지식의 빛이 아닌, 차가운 절망의 그림자뿐이었다.
“젠장, 또 놈들이 몰려와.”
강은호 선배의 거친 숨소리가 텅 빈 복도에 울렸다. 그의 손에 쥐인 마나 블레이드에서 푸른 불꽃이 일렁였다. 길고 날카로운 검날이 희미한 비상등 불빛 아래에서 섬뜩하게 빛났다. 그의 등 뒤에는 피로 물든 아카데미 교복이 너덜너덜하게 매달려 있었다. 언제나 깔끔하고 흐트러짐 없던 선배의 모습은 간데없었다.
나는 은호 선배의 뒤를 따르며, 등 뒤에서 솔이의 흐느끼는 소리를 애써 외면했다. 솔이는 아직 열일곱, 입학한 지 채 한 학기도 되지 않은 어린 신입생이었다. 이 끔찍한 지옥 같은 현실을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여린 아이였다.
“미나, 제발, 어떡해요…!”
솔이의 목소리는 공포에 질려 떨렸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마법 지팡이를 꽉 쥐었다. 지팡이 끝에 매달린 수정구에는 희미한 보호 마법이 걸려 있었다. 이젠 그것조차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아카데미의 마나 흐름은 완전히 뒤틀려버렸고, 마법은 더 이상 우리의 든든한 방패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놈들을 더 강력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는 끔찍한 소문도 돌았다.
“쉬잇, 솔아. 괜찮아.” 나는 작게 속삭였다. 괜찮을 리 없었지만.
복도 저편에서 ‘그것’들의 신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보통 좀비들과는 다른, 기괴하고 음침한 소리였다. 아카데미에 만연한 좀비들은 단순히 죽은 자가 아닌, 마법에 오염된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침묵의 절규자’라고 불렸다. 외형은 끔찍하게 뒤틀려 있었지만, 입에서 나는 소리는 마치 목이 졸린 채 비명을 지르는 듯한, 소름 끼치는 울림이었다. 그리고 그 소리가 들리면, 우리는 곧 그들이 곧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번엔 좀 많군.” 은호 선배가 중얼거렸다. 그의 눈동자는 냉정하게 빛나고 있었다. “미나, 솔이 데리고 이쪽으로. 내가 길을 열겠다.”
그가 손을 휘두르자 마나 블레이드에서 푸른 마나의 파도가 뿜어져 나갔다. 복도 모퉁이를 돌며 쏟아져 들어오던 침묵의 절규자들 중 몇몇이 파도에 휩쓸려 벽에 처박혔다. 하지만 그들의 몸은 마치 고무처럼 비틀리고 꺾였을 뿐, 완전히 부서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뒤틀린 몸으로 일어서는 모습은 혐오스러움을 넘어선 공포였다.
“피해! 서둘러!” 은호 선배가 소리쳤다.
우리는 그가 잠시 벌어준 틈을 타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우리의 목적지는 임시로 봉쇄해두었던 도서관 2층의 비밀 통로였다. 그곳은 한때 아카데미의 가장 은밀한 서고 중 하나였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안전하지 못했다.
“하아, 하아… 여긴… 더 이상… 안 돼요, 선배.” 솔이가 울먹이며 말했다.
도서관 2층의 비밀 통로 입구는 묵직한 마법 방어막으로 보호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방어막은 이미 군데군데 균열이 가 있었고, 균열 사이로는 썩은 피 냄새와 함께 절규자들의 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은호 선배는 방어막을 확인하더니 얼굴을 굳혔다.
“망할, 이 정도면 버텨봐야 두세 시간이다. 어딘가 다른 곳을 찾아야 해.”
“다른 곳이요? 아카데미에 더 이상 안전한 곳은 없잖아요!” 나는 절망적으로 말했다.
은호 선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찢어진 마법 서적들이 바닥에 뒹굴고, 선반들은 무너져 내렸다. 한때 아카데미의 자랑이던 지식의 전당은 이제 폐허였다. 그의 시선이 한 곳에 멈췄다. 오래된 서가 뒤, 다른 책들보다 훨씬 두껍고 낡은 가죽 장정의 책이 꽂혀 있는 곳이었다. 그 책은 다른 책들과 달리 미세한 마법적인 에너지로 보호받고 있는 듯했다.
“이게… 뭐지?” 은호 선배가 책을 꺼냈다.
두꺼운 책의 표지에는 낡은 인장이 찍혀 있었다. 아카데미의 문장이었지만, 우리가 알던 것과는 다른, 더 고대의 형태였다. 책장을 넘기자 기괴한 문자들과 함께 고대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지도의 중심에는 아카데미의 전경이 그려져 있었고, 그 밑으로 깊고 복잡한 지하 미궁이 묘사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미궁의 가장 깊은 곳에는 거대한 원형의 공간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 공간 위에는 핏빛으로 칠해진 문자가 섬뜩하게 새겨져 있었다.
‘금기. 심연의 심장.’
나는 그 문자를 읽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고대 라틴어와 알 수 없는 마법 기호가 뒤섞인 문구였다.
“선배, 이거… 아카데미의 금지된 구역 아닌가요? 전설로만 내려오던…”
“그래, 어쩌면 이곳이 우리가 찾던 답일지도 몰라.” 은호 선배의 눈빛이 흔들렸다. 두려움과 함께 알 수 없는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이 지도가 가리키는 곳은, 아카데미의 가장 오래된 기록에도 없는 곳이야. ‘심연의 심장’이라… 감히 발을 들여놓는 자는 파멸할 것이라는 경고문이 있었지.”
“파, 파멸이라니요!” 솔이가 겁에 질려 외쳤다. “절대 안 돼요! 저런 곳에 어떻게 가요!”
“이대로 죽는 것보단 나아.” 은호 선배의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깃들어 있었다. “이 아카데미의 좀비화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아낼 유일한 방법일지도 몰라. 어쩌면 그곳에 해답이 있을 수도 있다.”
나는 지도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아카데미 도서관 지하에는 고대 마법진이 그려진 곳이 있었다. 그곳은 일반 학생들에게는 출입이 금지된 ‘고대 유물 보관실’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이 지도는 그 보관실조차 넘어, 더 깊은 지하로 통하는 비밀 통로를 가리키고 있었다.
“여기야.” 은호 선배가 책 한구석에 그려진 작은 마법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도서관 가장 오래된 서고 지하에 숨겨진 입구. ‘망각의 서고’라고 불리던 곳이다.”
‘망각의 서고’는 이름만 들어도 음산한 기운이 감도는 곳이었다. 오래전부터 학생들 사이에선 그곳에 들어간 선배들이 실종되었다는 괴담이 돌기도 했다.
“하지만… 너무 위험해요.” 내 목소리도 떨렸다.
“위험하지 않은 곳이 어디 있겠어, 미나.” 은호 선배는 체념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정부나 마법사 협회는 이미 우리를 버렸어. 남은 건 우리 스스로 살아남는 것뿐이야. 자, 솔아. 마법진 준비해.”
솔이는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작은 손에서 녹색 마나가 피어올랐다. 그녀의 치유 마법은 전투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마법진을 해독하거나 보호 마법을 다루는 데에는 능숙했다.
우리는 도서관 가장 깊숙한 곳, 퀴퀴한 먼지가 쌓인 서가 뒤편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거대한 석판이 박힌 벽이 있었다. 은호 선배는 책에서 본 마법진을 그 위에 따라 그렸다. 솔이의 마나가 흐르자 석판에서 희미한 빛이 났다. 이윽고 육중한 석판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안쪽으로 열렸다.
차가운 공기와 함께 곰팡이 냄새, 그리고 무언가 썩어가는 듯한 역겨운 비린내가 확 끼쳐왔다. 석판 뒤편으로는 어둠만이 존재했다. 끝을 알 수 없는 나선형 계단이 아래로 깊숙이 이어져 있었다.
“젠장, 정말 지옥의 입구 같군.” 은호 선배가 중얼거렸다.
나는 지팡이 끝에 작은 발광 마법을 걸었다. 희미한 빛이 계단을 비추었다. 계단 벽면은 젖어 있었고, 검은 이끼들이 기괴하게 피어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려갈수록 공기는 점점 더 차갑고 습해졌다. 멀리서 들려오는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알 수 없는 낮은 웅얼거림이 우리의 심장을 조여왔다.
“선배, 이 소리… 혹시…?” 솔이가 두려움에 질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것은 절규자들의 소리가 아니었다. 훨씬 더 낮고, 굵고, 마치 수십 명이 동시에 웅얼거리는 듯한 소리였다. 인간의 목소리라고 하기엔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쉬잇.” 은호 선배가 조용히 하라는 듯 손을 들었다. “모르겠다. 하지만 경계를 늦추지 마.”
한참을 내려갔을까. 계단의 끝에 다다르자 우리는 거대한 통로에 들어섰다. 통로의 벽면은 매끄러운 검은 돌로 되어 있었고, 곳곳에는 기이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아카데미의 양식과는 전혀 다른, 훨씬 더 고대의, 그리고 불길한 문양들이었다. 발광 마법의 빛은 고작 몇 미터 앞만을 비출 뿐이었다.
“이건… 아카데미가 세워지기 전부터 존재했던 건가?” 나는 경외감과 공포에 사로잡혀 중얼거렸다.
통로를 따라 걷자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그곳은 거대한 원형의 홀이었다. 홀의 중앙에는 거대한 석상이 서 있었다. 그 석상은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얼굴은 기괴하게 일그러져 있었고, 몸은 수많은 팔과 다리로 이루어진 듯 보였다. 마치 고통에 몸부림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석상 주변에는 수많은 제단들이 원을 그리고 있었다. 각 제단 위에는 마른 피의 흔적과 함께, 녹슬고 부서진 마법 도구들이 놓여 있었다.
“이게… 대체 뭐지?” 은호 선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내 눈은 홀의 벽면에 새겨진 그림들에 꽂혔다. 그 그림들은 아카데미의 기원과 관련된 듯했다. 학자들이 무언가를 연구하고, 마법진을 그리는 모습. 하지만 그림의 후반부로 갈수록 내용은 점점 더 끔찍하게 변해갔다. 피와 살점이 튀고, 실험대 위에서 인간의 형체가 뒤틀리는 모습. 그리고 마침내, 거대한 에너지의 폭발과 함께 홀 전체가 피로 물드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림의 마지막에는, 뒤틀린 형상들이 서서히 일어서는 모습이 섬뜩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그것은… 침묵의 절규자들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이곳이… 이곳이 시작점이야.”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아카데미가 숨겨온 끔찍한 진실. 그들은… 이 지하에서 금지된 실험을 했던 거야.”
바로 그때, 홀 중앙의 거대한 석상에서 빛이 났다. 핏빛처럼 붉은 빛이 섬뜩하게 일렁이며, 석상 주변의 제단들에서 기이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른 피의 흔적들이 다시 액체가 되어 흘러내리고, 녹슨 도구들은 마치 되살아나는 듯 격렬하게 진동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홀 벽면에 그려져 있던 그림 속 뒤틀린 형상들이 마치 현실이 된 것처럼 벽에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보통 절규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기괴한 형상이었다. 여러 개의 팔다리가 돋아나 있고, 몸에서는 검은 마나가 뿜어져 나왔다. 눈은 이글거리는 핏빛으로 빛났다.
“새로운… 종류의 놈들인가!” 은호 선배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마나 블레이드의 푸른 불꽃이 거세게 타올랐다.
홀 전체를 채우는 끔찍한 냄새와 함께, 뒤틀린 마나의 기류가 우리를 덮쳤다. 석상 주변의 그림자들이 길게 늘어지더니, 그 안에서 또 다른 기괴한 형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눈은 홀 중앙에 놓인 석상을 향하고 있었다. 마치… 그 석상이 그들의 심장인 것처럼.
우리는 이 끔찍한 금기의 심장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심장은 이미, 미쳐버린 지 오래였다.
“뒤… 뒤를 조심해!” 솔이의 비명에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서, 우리를 따라 내려왔던 통로가 닫히고 있었다. 거대한 석판이 다시 삐걱거리며 제자리를 찾아가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우리는 갇혔다. 금기의 심장부에, 끔찍한 진실과 함께.
그리고 홀 중앙의 거대한 석상, 그 일그러진 얼굴에서, 핏빛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그것은 마치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한, 깊고 검은 절망의 눈물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