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하늘은 맹렬한 증기전쟁의 상흔을 잊은 적이 없었다. 태양은 언제나 희미한 잿빛 막에 가려져 희뿌옇게 부서지는 빛줄기조차 사치였다. 거대한 강철 도시는 과거의 영광을 잃고 덩치 큰 유령처럼 앙상하게 서 있었다. 녹슨 톱니바퀴들은 더 이상 돌아가지 않았고, 황동색 파이프들은 제 기능을 잃은 채 거대한 뼈대처럼 뻗어 있었다.
이 폐허 속에서, 재이는 오늘도 살기 위해 움직였다. 그녀의 발걸음은 낡은 가죽 부츠 속에서 나직이 울렸다. 한쪽 팔은 녹슨 강철과 황동으로 만들어진 의수였다. 전쟁 중 잃은 팔을 대신한 이 기계 팔은 그녀의 몸과 한 몸처럼 움직이며, 때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도 했다. 손목의 작은 증기 조절기를 돌리면, 팔뚝의 기어들이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젠장, 연료가 바닥났군.”
재이는 입술을 비죽였다. 휴대용 증기기관의 압력 게이지는 붉은색 경고등을 깜빡이고 있었다. 이걸 그대로 두면 오늘 밤은 얼어 죽거나, 아니면 기계 괴물들에게 잡아먹힐 게 뻔했다. 그녀의 임시 거처인 쓰러진 비행선의 잔해는 더 이상 따뜻함을 제공할 수 없었다. 지금 필요한 건 단 하나, 압축된 증기 연료였다. 그것도 고순도의 에테르 응축 증기여야만 했다.
재이의 시선은 멀리 우뚝 솟아있는 거대한 시계탑을 향했다. ‘시간의 군주’라고 불리던 이 탑은 한때 도시의 심장이었지만, 지금은 미쳐버린 태엽 장치들과 고장 난 자동 인형들이 득실거리는 위험한 구역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가장 순수한 증기 연료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기도 했다. 전쟁 전, 이 탑은 도시 전체의 시간을 동력으로 움직이는 거대한 에테르 증기 발생 장치를 가지고 있었다. 그 장치가 여전히 어딘가에서 불안하게나마 작동하고 있을 것이라는 희망. 그 희망이 그녀를 움직이게 했다.
삐걱거리는 금속음이 들려왔다. 재이는 재빨리 낡은 건물 잔해 뒤로 몸을 숨겼다. 희미한 잿빛 먼지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파수꾼’이라고 불리는 자동 인형이었다. 키는 족히 세 미터는 될 듯한 이 기계 괴물은 과거에는 도시의 질서를 유지하던 보안 로봇이었지만, 전쟁으로 모든 제어 장치가 파괴된 후에는 무작위로 움직이며 살아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들의 눈에서는 붉은 광선이 번뜩였다.
“하필 지금 나타나다니.”
재이는 옆구리에 찬 증기 압력 나이프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칼날은 평소에는 접혀 있다가, 손잡이의 증기 레버를 당기면 고압 증기의 힘으로 순간적으로 길게 뻗어 나와 강력한 절단력을 발휘했다. 그녀의 다른 손에는 개조된 증기 활이 들려 있었다. 일반적인 활이 아닌, 고압 증기의 힘으로 금속 볼트를 발사하는 이 활은 소음이 적고 위력이 강해 그녀의 주력 무기였다.
파수꾼은 녹슨 다리로 쿵, 쿵,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그 거대한 몸체는 수많은 톱니바퀴와 증기 파이프로 이루어져 있었고, 오래된 기름때와 잿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녀석의 머리 부분에 달린 카메라 렌즈가 그녀가 숨은 곳을 향해 움직였다. 탐지 범위 안에 들어왔다.
“젠장.”
숨소리조차 죽이고 있던 재이는 순간적으로 몸을 날렸다. 파수꾼이 몸을 돌려 붉은 광선을 발사하려는 찰나, 그녀는 이미 건물 잔해를 박차고 튀어나와 녀석의 옆구리로 달려들고 있었다. 의수의 손가락들이 능숙하게 증기 활의 방아쇠를 당겼다. 픽, 하는 소리와 함께 금속 볼트가 발사되어 파수꾼의 무릎 관절을 강타했다. 녀석의 거대한 몸체가 휘청거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재이는 기계 팔의 증기 조절기를 최대로 올렸다. 쉭- 하는 증기 분출음과 함께 기계 팔의 관절들이 격렬하게 움직였다. 그녀는 파수꾼의 무너지는 몸체 위로 뛰어올라 거대한 어깨 부분에 착지했다. 녀석의 카메라 렌즈가 그녀를 향해 다시 돌아왔지만, 이미 늦었다.
“이게 네 마지막이다, 고철 덩어리!”
재이는 증기 압력 나이프를 뽑아 들었다. 손잡이의 레버를 당기자 쉭- 하는 소리와 함께 칼날이 길게 튀어나왔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칼날을 파수꾼의 목덜미에 해당하는, 증기 파이프들이 복잡하게 얽힌 부분에 꽂아 넣었다. 고압 증기의 힘이 칼날을 꿰뚫고 파이프들을 절단했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증기가 분출되며 녀석의 머리 부분이 찢겨 나갔다.
파수꾼의 몸체가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거대한 강철 덩어리가 땅에 처박히는 굉음이 폐허 전체를 울렸다. 재이는 잔해 위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그녀의 얼굴에는 잿먼지와 기름때가 뒤섞여 있었지만, 눈빛만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시간 낭비했군. 빨리 움직여야 해.”
다시 발걸음을 옮긴 재이는 시계탑으로 향하는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골목은 좁고 어두웠으며, 버려진 기계 부품들과 뼈대만 남은 자동차들이 널려 있었다. 녹슨 강철 구조물들은 위태롭게 기울어져 있었고, 언제 무너져 내릴지 모르는 위협을 품고 있었다.
시계탑의 거대한 철문은 이미 오래전에 박살 나 있었다. 그 안은 어둠과 습기로 가득했다. 재이는 의수 손목의 작은 손전등을 켰다. 증기압으로 작동하는 이 손전등은 희미하지만 충분한 빛을 발산했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거대한 톱니바퀴들과 체인, 그리고 복잡하게 얽힌 증기 파이프들이었다. 이곳이 바로 시간의 군주의 심장이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탑의 심장 박동처럼 규칙적인 ‘쉬이익,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불안정하게 작동하고 있는 에테르 증기 발생 장치의 소리였다. 고열과 에테르 증기가 섞인 냄새가 코를 찔렀다. 재이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바닥에는 부서진 자동 인형들의 잔해가 널려 있었고, 일부는 여전히 붉은 눈을 깜빡이며 불안정한 움직임을 보였다.
“찾았다.”
재이의 눈에 들어온 것은 탑의 가장 깊숙한 곳, 거대한 원통형 장치에 연결된 수많은 증기 압력 탱크들이었다. 그중 하나의 탱크는 금이 가 있었지만, 나머지 탱크들은 아직도 고압의 에테르 증기를 품고 있었다. 바로 그녀가 찾던 연료였다.
하지만 그곳으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거대한 톱니바퀴들이 불규칙하게 돌아가고 있었고, 뿜어져 나오는 증기 때문에 시야 확보조차 어려웠다. 무엇보다, 탱크 주변에는 더 작지만 훨씬 빠르고 날카로운 ‘톱니개’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전쟁 전에는 탑을 청소하던 소형 자동 인형이었지만, 이제는 늑대처럼 무리를 지어 움직이는 살인 기계들이었다.
네 마리의 톱니개가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강철로 된 몸체는 날렵했고, 입에는 날카로운 톱니 칼날이 박혀 있었다. 재이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는 증기 활을 재빨리 들어 올렸다.
첫 번째 톱니개가 덤벼들자, 그녀는 옆으로 몸을 비틀며 회피했다. 동시에 활에서 발사된 금속 볼트가 녀석의 약점인 동력원, 즉 목덜미의 작은 증기 연결 부위를 정확히 맞췄다. 삐비빅! 하는 소리와 함께 톱니개가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두 번째와 세 번째 톱니개는 동시에 양쪽에서 덮쳐왔다. 재이는 한 손으로는 증기 활을 휘둘러 한 마리의 공격을 막아내고, 다른 의수로는 증기 압력 나이프를 꺼내들었다. 쉭- 하고 뻗어 나온 칼날이 다른 한 마리의 옆구리를 그대로 꿰뚫었다. 철판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증기가 분출되었다.
남은 한 마리는 잠시 주춤거렸다. 재이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남은 활의 볼트를 발사했다. 정확히 이마 한가운데에 박힌 볼트는 톱니개의 움직임을 완전히 멈추게 했다.
“휴… 이 정도면.”
그녀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쓰러진 톱니개들의 잔해 속에서, 그녀는 망설임 없이 가장 온전해 보이는 증기 압력 탱크를 향해 다가갔다. 의수 손가락의 정교한 조작으로 연결 밸브를 열고, 휴대용 응축기에 증기를 추출하기 시작했다. 쉭, 쉭, 쉭. 고압 증기가 응축기로 빨려 들어가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울렸다. 차가웠던 응축기가 서서히 뜨거워지고, 게이지가 빠르게 올라갔다.
“이 정도면 며칠은 버틸 수 있을 거야.”
충분한 양의 증기를 확보하자, 재이는 지체 없이 탑을 빠져나왔다. 탑 안에서 더 이상 지체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언제 미쳐버린 거대 태엽 장치들이 그녀를 덮칠지 모를 일이었다.
잿빛 하늘 아래, 폐허가 된 도시를 가로지르는 그녀의 발걸음은 조금 더 가벼워져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오늘은 살아남았다. 하지만 내일은 또 다른 연료, 또 다른 부품을 찾아 나서야 할 터였다. 이 끝없는 생존의 몸부림 속에서, 그녀는 그저 한 걸음씩 나아갈 뿐이었다.
낡은 비행선 잔해로 돌아온 재이는 응축된 증기 연료를 휴대용 증기기관에 연결했다. 쉭- 하는 소리와 함께 차가웠던 기관이 다시금 활기찬 소리를 내며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희미한 불빛이 비행선 잔해 내부를 밝혔다. 그녀는 낡은 금속 침대에 몸을 뉘였다.
“하루가 또 지나갔군.”
천장을 올려다보자, 녹슨 강철 틈새로 잿빛 하늘이 보였다. 그 속에서 아주 희미하게, 부서진 별빛 같은 것이 반짝이는 듯했다. 그것은 희망일까, 아니면 그저 먼지 속의 착각일까. 재이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일도 다시 일어설 것이다. 강철 의수에 기름칠을 하고, 증기 활의 볼트를 점검하며, 또 다른 폐허 속으로 발걸음을 옮길 것이다. 이 혹독한 세상에서, 생존 그 자체가 그녀의 유일한 이유였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