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힐링 애니메이션 독립적인 단편 소설

별빛 아파트 1203호는 지혜에게 있어 평온 그 자체였다. 창밖으로는 도시의 회색빛 빌딩들이 끝없이 펼쳐졌지만, 그녀의 작업실은 늘 따뜻한 햇살과 은은한 커피 향으로 가득했다.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는 지혜는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고, 그만큼 이 공간에 대한 애착도 깊었다.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고,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보내는 나날들은 그녀에게 소박하지만 확실한 행복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그 완벽한 평온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분명 작업대 위에 올려두었던 연필깎이가 책장 위로 옮겨져 있거나, 마시던 머그잔이 부엌 싱크대가 아닌 거실 테이블에서 발견되는 식이었다. “에이, 내가 건망증이 심해졌나.” 지혜는 피식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피로가 쌓여 헛것을 봤을 거라 생각했다.

사건은 점점 대담해졌다.
하루는 아침에 눈을 뜨니, 침대 맡 협탁 위에 놓여 있던 안경이 코끼리 모양의 인형 위에 얌전히 얹혀 있었다. 지혜가 키우는 작은 다육식물 화분은 항상 창문에서 가장 먼 곳에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날이면 햇빛을 향해 방향을 튼 채 발견되곤 했다. 흡사 작은 손길이 매만진 듯한 흔적이었다.

“뭐지? 누가 밤새 다녀갔나?”
지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어락은 완벽했고, 창문도 단단히 잠겨 있었다. 혼자 사는 아파트에서 이런 일이 반복되자, 그녀는 슬그머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혹시 스트레스 때문일까 싶어 잠시 작업을 멈추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지혜는 평소처럼 태블릿으로 그림을 그리다 잠시 화장실에 다녀왔다. 돌아와 보니, 그림이 거의 완성 단계에 가까웠던 태블릿 화면 위에, 그녀가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색상으로 알 수 없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조그마한 집 한 채와 그 앞에 서 있는 사람의 형상. 마치 어린아이가 그린 듯 서툴지만, 정겨운 느낌의 그림이었다.

지혜는 의자를 뒤로 밀며 비명을 삼켰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말도 안 돼… 내가… 내가 그린 게 아니야.”
손이 덜덜 떨렸다. 심장이 발버둥 치듯 쿵쾅거렸다. 그녀는 누가 침입한 흔적을 다시 한번 샅샅이 찾아보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단지, 그녀의 태블릿에 새겨진 미지의 그림만이 그 모든 불가능한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날 밤, 지혜는 불을 켜둔 채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건 도둑이나 건망증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의 아파트에는, 그녀가 모르는 무언가가 함께 살고 있었다. 폴터가이스트.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다음 날 아침, 빵집에서 사 온 식빵을 토스터기에 넣으려던 지혜는 깜짝 놀랐다. 분명 어젯밤에 다 먹었던 식빵 봉투 안에 갓 구운 듯 따뜻한 식빵 두 조각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식빵 옆에는 종이 한 장이 곱게 접혀 있었다.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펼쳐보니, 어젯밤 태블릿에 그려져 있던 것과 똑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작은 집과 사람. 그리고 그 아래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배고프지?’
지혜는 식빵을 들고 서서 한참을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이 폴터가이스트는, 그녀를 놀라게 할 뿐만 아니라, 챙겨주려고 하는 것인가?

그때부터 지혜의 일상은 미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종종 미리 데워진 물이 컵에 담겨 있거나, 책상 위의 어질러진 그림 도구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때로는 그녀가 찾던 책이 서재가 아닌 침대 머리맡에 놓여 있기도 했다. 한번은 그녀가 심혈을 기울여 그리던 그림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색깔이 덧칠되어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 색깔은 그림을 훨씬 더 풍부하게 만들었다.

“고마워요, 어… 유령님?”
지혜는 텅 빈 공간을 향해 말을 걸었다. 처음의 공포는 어느새 기묘한 친밀감으로 바뀌어 있었다. 폴터가이스트는 장난기 많고, 조금은 덤벙대지만, 분명 그녀를 아끼는 존재 같았다. 지혜가 곤란해하면 물건을 옮겨 돕고, 슬퍼 보이면 따뜻한 차를 끓여 옆에 놓아주려고 애쓰는 듯했다. 물론 차는 언제나 차가운 물 상태로 싱크대에 놓여 있었지만.

어느 비 오는 날 오후, 지혜는 마감 때문에 밤샘 작업을 한 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문득, 어깨에 따뜻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녀가 덮지도 않았던 담요가 어깨까지 조심스럽게 끌어당겨져 있었다. 그리고 멀리서, 아주 희미하게, 오래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을, 오직 그녀에게만 들리는 위로의 선율이었다.

지혜는 눈을 감고 피식 웃었다. 이제는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이 미스터리한 동거인이 주는 작은 위로와 관심이 그녀의 외로운 일상에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그녀는 태블릿을 켜고, 아까 그 폴터가이스트가 그렸던 작은 집 그림을 다시 불러냈다. 그리고 그 집 옆에, 웃는 얼굴의 사람을 그려 넣었다. 창밖으로 빗방울이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지혜의 아파트 1203호는 그 어느 때보다 아늑하고 따뜻했다.

다음 날 아침, 지혜는 냉장고 문에 붙어 있는 포스트잇을 발견했다. 어젯밤 그녀가 태블릿에 그린, 웃는 얼굴의 사람이 있는 집 그림이 고스란히 옮겨져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이번에도 삐뚤빼뚤한 글씨로, ‘고마워’라는 단 한 글자가 적혀 있었다.

지혜는 냉장고 문을 매만지며 활짝 웃었다. 창밖으로 여전히 빌딩 숲이 펼쳐져 있었지만, 그녀의 아파트는 더 이상 혼자만의 공간이 아니었다. 소리 없이 움직이는 물건들, 알 수 없는 메시지들, 그리고 때로는 서툰 위로까지. 그녀는 이 모든 기이한 현상들이 이제는 익숙하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별빛 아파트 1203호는 그렇게, 세상에 둘도 없는 특별한 동거인의 집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지혜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