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균열 (The Rift)
이진우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완전히 몰입해 있었다. 쨍한 푸른색 마나가 아치형 천장을 휘감고, 고대 유적의 돌기둥마다 새겨진 문양들이 희미하게 빛났다. 거대한 마법진이 바닥에서부터 솟아오르며 공간 전체를 뒤흔들었다. 그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그림자 촉수들이 맹렬히 회전하며 방금 소환된 악마 군주의 다리를 묶었다.
“젠장, 버텨라! ‘심연의 속박’ 쿨타임 10초!”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가상현실 헤드셋이 그의 뇌에 직접 신호를 보내는 듯, 거대한 악마 군주의 포효가 고막을 찢을 듯 생생하게 들렸다. 등 뒤로는 동료 파티원들의 마법 주문과 검격 소리가 난무했고, ‘실라스’라는 닉네임의 그의 캐릭터는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기며 간신히 악마의 돌진을 피했다. 그는 ‘아르카나’ 월드에서 손꼽히는 그림자 마법사였다. 현실에서는 낡은 아파트 구석에 박혀 사는 방구석 폐인일지라도, 이곳 아르카나에서는 그 어떤 존재보다 강력하고, 그 어떤 모험보다 짜릿한 삶을 살고 있었다.
“진우님! 버프!”
파티원 중 한 명인 힐러 ‘은빛날개’의 다급한 외침에 진우는 심호흡을 했다. 그의 캐릭터, 실라스의 그림자 지팡이가 허공을 가르자, 악마 군주의 몸에 끈적한 어둠의 기운이 휘감겼다. 잠시 움직임이 둔해진 틈을 타, 파티원들의 일제 공격이 쏟아졌다. 거대한 악마 군주가 마침내 무릎을 꿇고, 이내 산산조각 나며 사라졌다.
“휴… 끝났다!”
“진우님 미쳤다! 딜 미터기 또 찢었네!”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진우는 긴장이 풀리면서 온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퀘스트 보상 아이템을 확인하고, 파티원들과 농담을 주고받은 후, 그는 익숙하게 로그아웃 버튼을 눌렀다.
“오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내일 봐요!”
눈앞의 화려한 아르카나 월드가 점멸하듯 사라지고, 지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현실의 풍경이 천천히 그의 시야를 채웠다. 습관적으로 헤드셋을 벗어던졌다.
오후 늦은 시간, 그의 작은 원룸 아파트의 공기는 정지된 듯 고요했다. 창밖으로는 회색빛 건물의 숲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고, 미세먼지 탓인지 하늘은 뿌옇게 흐려 있었다. 방금까지 그림자 마법으로 세상을 뒤흔들던 영웅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침대 위에 널브러진 추리닝 차림의 이진우만 남아 있었다.
목이 말랐다. 그는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향했다. 식탁 위에는 어제 먹다 남은 배달 음식 용기가 놓여 있었다. 대충 치울 생각만 하고 지나쳐 냉장고 문을 열었다. 시원한 물병을 꺼내 들고 컵을 찾는데, 뭔가 이상했다.
늘 컵걸이에 정갈하게 걸려 있던 머그컵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깨지진 않았지만, 늘어진 채 식탁 다리에 기대어 있었다.
‘내가 떨어뜨렸나?’
고개를 갸웃했다. 컵을 떨어뜨릴 만한 일을 한 기억이 없었다. 어제 분명히 설거지를 하고 잘 걸어두었는데. 무심코 주워 다시 걸어두었다. 피곤해서 착각했겠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밤이 깊어질수록 아파트의 침묵은 더욱 짙어졌다. 창밖은 검은 도화지처럼 변했고,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도시의 소음만이 그가 홀로 이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님을 상기시켰다. 이진우는 다시 헤드셋을 쓰고 아르카나로 접속했다. 오늘은 사냥 대신, 새로 얻은 재료로 아이템을 제작하는 시간이었다. 실라스는 조용히 연금술 작업대 앞에 앉아 신비로운 약초들을 다듬고 있었다.
집중해서 재료를 조합하던 그때였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한기(寒氣)가 목덜미를 스쳤다. 마치 누군가 뒤에서 차가운 숨결을 불어넣은 듯한 섬뜩한 감각이었다. 이진우는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뭐지? 보일러를 너무 약하게 틀었나?’
헤드셋을 벗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 안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창문도 닫혀 있었고, 에어컨도 꺼져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다시 헤드셋을 쓰고 게임 화면으로 돌아왔지만, 한 번 깨진 집중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애써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려 했다. 밤샘 게임에 시달린 뇌가 만들어낸 착각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헤드셋의 진동 기능이 오작동한 것일 수도 있고.
그렇게 한 시간을 더 보냈을까. 연금술 작업이 거의 끝나갈 무렵, 이번엔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펜꽂이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아니, 움직인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은 게임 화면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시야 한구석, 헤드셋과 코 사이의 작은 틈새로 얼핏 보인 광경이었다. 펜꽂이에 꽂혀 있던 샤프 하나가 스르륵, 미끄러지듯 책상 모서리로 이동하는 모습이.
이진우는 순간적으로 마우스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번엔 착각이 아니었다. 분명히 봤다. 그는 망설임 없이 헤드셋을 벗었다.
책상 위를 응시했다. 펜꽂이는 원래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 꽂혀 있던 샤프는… 책상 모서리 끝에 위태롭게 걸쳐져 있었다. 조금만 더 밀리면 떨어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위치였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아무런 바람도 불지 않는 실내였다. 책상은 견고하게 바닥에 붙어 있었고, 그 어떤 진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그는 두려움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머릿속으로 온갖 합리적인 설명을 찾으려 했지만, 그 어떤 것도 납득할 수 없었다. 귀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이건 그냥 오래된 아파트의 현상일 뿐이라고, 자신을 다그쳤다.
‘미쳤나 봐. 나 요즘 너무 게임만 했나?’
자신이 스트레스와 수면 부족으로 환각을 보는 것이라고 애써 믿으려 했다. 일단 게임을 끄고 쉬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헤드셋을 벗으려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콰아앙!***
바로 옆, 부엌에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마치 냄비가 곤두박질치는 듯한, 혹은 그보다 더 크고 날카로운 소리. 이진우는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에 몸을 굳혔다.
이어진 것은 유리 파편이 바닥에 흩뿌려지는, 깨지기 쉬운 무언가가 박살 나는 소리였다. 귀를 찢을 듯한 소음 뒤에는 섬뜩한 정적이 찾아왔다.
진우는 헤드셋을 든 채로 완전히 얼어붙었다. 얼굴에 피가 가시는 듯한 기분이었다. 망설임 끝에 겨우 헤드셋을 잡아 뜯었다.
부엌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어두컴컴한 부엌 안에서 전등이 미친 듯이 깜빡이고 있었다. 꺼졌다 켜졌다, 꺼졌다 켜졌다. 마치 경련이라도 일으키는 것처럼.
그는 조심스럽게, 발소리조차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부엌으로 다가갔다. 전등의 깜빡임 사이로 보이는 광경은 그의 남은 이성마저 집어삼켰다.
싱크대 앞 바닥에는 깨진 유리컵의 파편들이 산산조각 나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위, 늘 굳게 닫혀 있던 수납장 문 하나가 활짝 열린 채,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있었다. 차가운 냉기가 부엌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진우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이건 착각이 아니었다. 피로 때문도, 스트레스 때문도 아니었다.
이건… 현실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그의 아파트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서,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선명한 균열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현실의 차가운 균열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