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의 차가운 바람이 창문을 얇게 흔들었다. 어느덧 나뭇가지들은 앙상한 뼈대만 남긴 채, 마지막 잎새마저 미련 없이 떨어뜨린 후였다. 지혜는 창가에 앉아 회색빛으로 물든 하늘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손에 들린 따뜻한 찻잔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지만, 마음속 깊이 스며드는 한기는 쉬이 가시지 않았다.
바람이 실어 나르는 건 비단 나뭇잎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마음속에도 오래된 고민의 씨앗이 다시금 고개를 들고 있었다. 며칠 전 받은 한 통의 전화. 서울을 떠나 아주 먼 지방으로 내려가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 누구에게나 찾아오기 힘든,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모든 것을 바꿔야 한다는 부담감도 컸다. 특히, 그녀의 일상과 가장 깊이 얽혀 있는 존재, 사비.
“하아…” 낮은 한숨이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그녀의 한숨 소리에 반응하듯, 거실 소파에서 곤히 잠들어 있던 사비가 스르륵 눈을 떴다. 회색빛 털과 금빛 눈동자. 그의 눈빛에는 늘 세상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듯한 깊이가 서려 있었다. 사비는 하품을 길게 하더니, 마치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키려는 듯 느릿하게 몸을 쭉 펴고는 지혜를 향해 다가왔다. 작은 발소리가 타일 바닥에 가볍게 울렸다.
지혜의 다리에 머리를 비비고, 꼬리를 살랑이는 사비의 행동은 항상 그녀의 마음을 녹이는 마법과도 같았다. 사비는 이내 지혜의 무릎 위로 가볍게 뛰어올라 동그랗게 몸을 말고 앉았다. 작지만 따뜻한 온기가 지혜의 허벅지에 스며들었다. 골골거리는 소리가 그녀의 가슴팍까지 울렸다.
“사비야.” 지혜는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사비는 고개를 들어 지혜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질문이 담겨 있는 듯했다. 무슨 일이야, 주인?
“나 말이야… 새로운 제안을 받았어. 아주 멀리 떠나야 하는 일인데…” 지혜는 사비의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곳에 가면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될 거야. 좋은 기회인 건 아는데… 네가 걱정돼. 우리가 함께 그곳에서 잘 지낼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널 데려갈 수 있을까?”
그녀의 목소리에는 불확실성과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사비는 그녀의 표정을 읽는 듯, 잠시 가만히 있다가 앞발로 지혜의 손을 툭 건드렸다. 그리고는 다시 그녀의 눈을 깊이 응시했다. 그 눈빛은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걱정 마, 나는 너와 함께라면 어디든 괜찮아.’
사비의 눈빛에서 지혜는 오래전 기억을 떠올렸다. 추운 겨울 초입, 처음 사비를 만났을 때의 일이었다. 앙상하게 마른 몸, 잔뜩 경계하는 눈빛, 하지만 춥고 배고팠던 그 작은 생명은 깡마른 몸을 이끌고 그녀의 아파트 문 앞까지 찾아왔었다. 처음에는 물러서던 그가 작은 통조림 하나에 조심스럽게 다가오던 모습, 며칠 밤낮을 그녀의 문 앞에서 버티다 결국 그녀의 마음에 들어오게 된 순간들. 그는 항상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살아남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래, 사비는 늘 그랬지.’ 지혜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떤 낯선 환경에서도 자신만의 자리를 찾아내고, 그곳을 자신의 세상으로 만들었어. 나보다 더 강하고 유연한 존재.’
사비는 다시 지혜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그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그녀의 피부에 전해지는 듯했다. 혹은 그녀의 심장 박동에 자신의 리듬을 맞추는 듯하기도 했다. 어쩌면 그 작은 몸이 그녀의 불안을 흡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거니? 정말 그래도 괜찮겠어?” 지혜는 다시 물었다. 이번에는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었다. 사비는 대답 대신 몸을 일으켜 창밖을 바라보았다. 앙상한 나무와 흐린 하늘, 그리고 그 너머로 펼쳐진 도시의 불빛들. 그의 금빛 눈은 그 모든 풍경을 담았다가 다시 지혜에게로 돌아왔다. 마치 ‘세상은 넓고, 우리는 함께 그 세상 속을 걸어갈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하는 듯했다.
지혜는 사비를 품에 꼭 안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털 속에 파묻힌 그의 몸은 더없이 든든하게 느껴졌다. 사비는 골골송을 더욱 크게 불렀고, 그 소리는 지혜의 가슴속 깊은 곳까지 울려 퍼졌다. 불안했던 마음속 먹구름이 서서히 걷히는 것을 느꼈다. 완벽한 답을 찾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비의 존재 자체가 그녀에게 가장 확실한 위로이자 용기였다.
“그래, 사비야. 우리가 함께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거야.” 지혜는 사비의 귀에 속삭였다.
사비는 그녀의 말을 이해한 듯, 꼬리를 살랑이며 기분 좋게 하품을 했다. 그의 금빛 눈은 이제 더 이상 질문을 담고 있지 않았다. 그저 지혜를 향한 깊은 신뢰와 변치 않는 사랑으로 빛나고 있었다. 새로운 시작의 두려움은 여전히 존재했지만, 그 옆에는 든든한 동반자가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 막 새로운 장을 준비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지혜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밤은 깊어지고 있었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작은 빛이 희미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어쩌면 그 빛은 어둠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게 해줄, 사비의 눈빛과도 같은 빛일지도 몰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