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찾아온 길고양이와의 대화 – 제15화

창밖에서 들려오는 쿵, 쿵, 쾅 하는 소리는 이제 일상이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멀리서 들려오는 희미한 메아리 같았지만, 날마다 그 소리는 더 선명해지고, 더 가까워졌다. 마치 거대한 짐승이 도시의 심장을 갉아먹는 듯한 불길한 예고처럼. 지수는 창가에 앉아 커피잔을 든 채 먼지를 뒤집어쓴 채 서 있는 크레인들을 바라보았다. 저 육중한 기계들이 매일 같이 땅을 파헤치고, 굉음을 토해낼 때마다, 지수의 마음속에는 불안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벌써 한 달째야.” 지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불안의 원인은 명백했다. 바로 별이.

그날 오후, 해 질 녘이 되자 별이가 나타났다. 평소처럼 담장을 넘어 지수의 정원으로 들어서는 별이의 걸음걸이는 어딘가 모르게 무거웠다. 윤기 나던 털은 예전만큼 생기가 없었고, 늘 총명하게 빛나던 눈동자에는 피로감이 서려 있었다. 지수는 별이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별이는 평소 같으면 지수의 손길에 몸을 비비거나 작게 골골거렸을 테지만, 오늘은 그저 묵묵히 몸을 맡길 뿐이었다.

“별아, 괜찮아? 요새 통 잠도 잘 못 자는 것 같고.” 지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별이는 길게 하품을 하더니, 힘없이 대답했다. “괜찮지 않아. 매일 밤 땅이 흔들리고, 낯선 냄새들이 바람을 타고 넘어와. 더 이상 편히 눈을 붙일 수가 없어.”

지수는 별이의 말이 가슴을 짓눌렀다. 저 공사 현장이 별이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그녀는 이제 똑똑히 알고 있었다. 처음 별이가 지수에게 다가왔을 때, 별이의 영토는 이 동네의 작은 공원과 그 주변의 낡은 건물들을 아우르는 꽤 넓은 영역이었다. 그곳은 별이에게 안식처이자 사냥터였고, 수많은 기억이 깃든 장소였다. 하지만 이제 그 모든 것이 거대한 포클레인의 이빨 아래 사라지고 있었다.

“그.. 그쪽 공원이 이제 거의 다 밀렸대. 새로 주상복합이 들어선다고….” 지수는 말을 잇지 못했다. 별이의 아픔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내기가 두려웠다.

별이는 고개를 들었다. 그 눈에는 평소 지수가 보지 못했던 깊은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알아. 매일 보고 있어. 내가 태어나고, 어미와 형제들을 처음 만났던 그 나무가 뽑히는 걸 봤고, 비를 피하던 낡은 창고가 무너지는 것도 봤어. 마치 내 기억들이 하나씩 지워지는 것 같아.”

별이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지수는 그 떨림이 단순한 불안이 아니라, 뿌리 뽑힌 존재의 상실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별이는 과거에도 여러 번 보금자리를 잃었을 것이다. 인간의 편의를 위해 무심하게 변해버리는 도시의 풍경 속에서, 길고양이들이 겪어야 할 비극은 늘 되풀이되는 패턴이었다.

“어떡하면 좋지?” 지수는 자신도 모르게 나지막이 말했다. 별이의 고통을 덜어줄 방법을 찾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인간이었고, 별이는 길고양이였다. 그들의 세계는 너무나 달랐다.

“떠나야 해.” 별이가 조용히 말했다.

지수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떠난다고? 어디로?”

“더 이상 여기에 머물 수 없어. 먹이를 구하기도 힘들고, 안전한 곳도 사라지고 있어. 나는 이곳에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어.” 별이의 눈은 멀리, 저녁놀에 물든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 속에는 오랜 시간 길 위에서 살아온 존재의 고독과 체념이 녹아 있었다.

“안 돼, 별아….” 지수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별이가 떠나는 상상은 지수에게 커다란 고통이었다. 이젠 그녀의 일상에서 별이가 없는 아침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저 고양이와 사람이 만나 대화를 나눈다는 신기함이나 흥미를 넘어, 별이는 지수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녀의 외로운 마음에 따뜻한 위안과 진정한 소통을 안겨준 유일한 존재였다.

지수는 무릎을 꿇고 앉아 별이를 마주 보았다. “내가… 내가 널 도와줄 수 있어. 우리 집에 들어와 살면 안 될까? 여기는 안전해. 따뜻하고, 배고플 일도 없을 거야.”

별이는 지수의 제안에 잠시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는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나는 길고양이야, 지수. 네 집에 갇혀 살 수는 없어. 내 발아래 흙이 느껴져야 하고, 바람의 냄새를 맡아야 해. 벽 안에 갇힌 삶은 내게 죽음과 다름없어.”

그 말에 지수는 할 말을 잃었다. 별이의 야생적인 본성을 그녀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별이의 말은 지수의 가슴에 비수처럼 박혔다. 그녀는 별이의 자유를 빼앗을 권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별이를 떠나보낼 수도 없었다.

“그럼… 그럼 내가 뭘 할 수 있는데? 내가 널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거야?” 지수의 목소리는 거의 울먹이는 수준이었다.

별이는 지수의 손에 이마를 기댔다. 그 촉감은 차가웠지만, 동시에 깊은 신뢰가 느껴졌다. “네가 할 수 있는 건, 이 순간을 기억하는 것. 그리고… 나를 믿어주는 것. 내가 어떤 선택을 하든, 내 결정을 존중해 주는 것.”

별이의 말은 지수에게 또 다른 딜레마를 안겨주었다. 사랑은 때로 상대방을 놓아주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했던가. 하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별이를 위하는 길인지, 아니면 자신의 무력함을 합리화하는 것인지 지수는 알 수 없었다.

밤이 깊어지자 별이는 담장 위에 앉아 마지막으로 지수의 집을 돌아보았다. 지수는 현관 앞에 서서 별이를 배웅했다. 별이의 실루엣이 달빛 아래 희미해지는 것을 보며, 지수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별이가 말한 ‘떠나야 한다’는 것이 단순히 다른 구역으로의 이동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니면 더 깊고 근본적인 이별의 서막일까.

별이는 잠시 멈춰 서서 뒤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나지막이 말했다. “지수, 이 세상 모든 것은 변하고 사라져. 하지만 어떤 기억은 절대 사라지지 않아. 네가 내게 준 따뜻함처럼.”

그 말을 끝으로 별이는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지수는 홀로 남겨진 정원에서 밤하늘의 별들을 올려다보았다. 수많은 별들이 반짝였지만, 그 어떤 별도 지금 그녀의 마음에 비친 별이만큼 빛나지는 않았다. 불안과 함께 새로운 다짐이 지수의 마음속에 싹트고 있었다. 어떤 방법으로든, 그녀는 별이와의 이 소중한 인연을 지켜내야만 했다. 설령 그것이 별이의 자유를 지켜주는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