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피아노가 부르는 노래 – 제17화

낡은 피아노가 부르는 노래 – 제17화

지우는 창밖으로 스미는 희미한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낡은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 건반 위로 내려앉은 먼지가 세월의 무게를 말해주는 듯했다. 며칠 전, 피아노의 해묵은 장식장 깊숙한 곳에서 발견했던 낡은 일기장과 함께, 지우는 잊혀진 시간 속으로 한 발짝 더 들어선 기분이었다. 할머니의 흔적이라고 굳게 믿었던 그 유물들이 사실은 할머니의 젊은 시절, 깊이 간직했던 누군가의 이야기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은 지우에게 크나큰 혼란이자, 동시에 풀고 싶은 열망으로 다가왔다.

오늘따라 피아노는 유난히 말이 없는 친구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피아노는 그 오랜 시간 동안 이 모든 비밀을 품고 홀로 침묵해왔을지도 모른다. 지우는 조심스럽게 건반 덮개를 열었다. 웅장하지만 낡은 검은색과 상아색 건반들이 마침내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지우의 손가락은 저절로 익숙한 멜로디를 더듬었다. 하지만 그 어떤 음도 오늘따라 깊이 다가오지 않았다. 마치 피아노가 자신의 진짜 노래는 아직 숨기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숨겨진 서랍의 속삭임

답답함에 지우는 의자에서 일어나 피아노의 가장자리를 천천히 쓸었다. 나무의 결마다 새겨진 수많은 흠집과 흔적들. 각기 다른 이야기와 웃음, 눈물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러다 문득, 지우의 손가락이 피아노 오른쪽 측면, 거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자리한 작은 틈새를 스쳤다. 얼핏 보면 장식의 일부처럼 보이는, 손가락 한두 마디 정도의 좁고 긴 틈이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지우는 그 틈새에 손톱을 넣어 살짝 힘을 주었다. 끼이익- 짧고 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나무 판 하나가 안쪽으로 밀려 들어가며 작은 서랍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우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피아노는 또 다른 비밀을 품고 있었다. 서랍 안에는 겹겹이 쌓인 낡은 편지들과 함께, 닳고 해진 벨벳 주머니 하나가 놓여 있었다. 편지는 모두 손때가 묻어 누렇게 변해 있었고, 어떤 것은 모서리가 너덜거렸다. 지우는 떨리는 손으로 가장 위에 있는 편지를 집어 들었다. 흐릿한 잉크로 쓰인 글씨는 우아하면서도 어딘가 애절함이 묻어났다. 첫 문장을 읽는 순간, 지우는 숨을 들이켰다.

‘나의 사랑하는 아가페에게,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어도 당신을 향한 나의 마음은 변치 않을 것입니다. 이 피아노의 선율처럼 영원히.’

아가페? 이 피아노의 원래 주인이었던 ‘윤서’의 일기장에는 종종 ‘H’라는 이니셜만 등장했었다. 아가페는 누구일까? 그리고 윤서는 누구에게 이 편지를 보낸 것일까? 아니면, 이 편지는 윤서에게 온 것일까? 지우는 혼란스러웠지만, 곧이어 이 편지들이 할머니의 필체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은 분명, 할머니가 이 피아노를 갖기 전의, 훨씬 더 오래된 이야기였다.

미완의 선율, 그리고 사진 한 장

벨벳 주머니 속에는 작고 낡은 은색 로켓 목걸이와 함께, 손바닥만 한 흑백사진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사진 속에는 젊은 남녀가 낡은 피아노 앞에 나란히 앉아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남자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고, 여자의 손은 피아노 건반 위에 가볍게 놓여 있었다. 여자의 옆모습에서 묘하게 윤서의 젊은 시절 모습이 겹쳐지는 듯했다. 그렇다면 이 남자가 ‘아가페’일까? 그의 얼굴은 어딘가 익숙한 듯 낯설었다.

더 놀라운 것은, 편지들과 사진 밑에 깔려 있던 악보 한 장이었다. 깨끗한 오선지 위에 정성스럽게 그려진 음표들. 하지만 중간에서 갑자기 뚝 끊겨 있었다. 마치 서둘러 멈춘 듯, 혹은 더 이상 이어갈 수 없었던 것처럼. 악보의 제목은 ‘아가페에게 바치는 노래’였다. 악보 위에는 ‘윤서에게, 사랑을 담아 H.’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H가 윤서의 사랑이었고, 아가페는 윤서가 그에게 붙여준 애칭이었을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지우는 악보를 피아노 건반대에 올려놓았다. 미완성된 선율은 시작부터 애잔했다. 멜로디는 부드럽게 흘러가다 어느 순간 격정적인 감정으로 치솟는 듯했지만, 이내 다시 가라앉으며 마지막 음표에서 멈춰 섰다. 지우는 악보를 따라 건반을 눌렀다. 어딘가 애틋하면서도 깊은 슬픔이 느껴지는 곡이었다. 하지만 미완성된 멜로디는 공허함을 남겼다. 마치 이야기가 도중에 끊어진 것처럼.

어느 피아노 조율사의 이야기

지우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안고 김 교수님에게 연락했다. 김 교수님은 오래된 악기와 음악사에 조예가 깊은 분으로, 지우가 이 피아노의 역사를 탐색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지우의 이야기를 들은 김 교수님은 잠시 침묵하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우 씨, 그 피아노… 혹시 ‘한정훈’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지 않나요? 아주 작은 글씨로요.”

지우는 놀라서 피아노의 내부를 자세히 살폈다. 건반 아래쪽, 거의 보이지 않는 구석에 희미하게 ‘한정훈, 1952’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지우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일기장에서 ‘H’라는 이니셜로만 존재했던 인물이 바로 ‘한정훈’이었던 것이다.

김 교수님은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한정훈 씨는 당시 명성이 자자했던 피아노 조율사이자, 동시에 뛰어난 작곡가였어.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음악을 세상에 잘 드러내지 않았지. 그가 만든 곡들은 대부분 사랑하는 이에게 바치는 노래였어. 그리고 그의 생애 가장 큰 사랑은, 당시 촉망받던 피아니스트 윤서 씨였다네.”

지우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사진 속 남자가 한정훈이었고, 여자가 윤서였던 것이다. “그럼… ‘아가페’는 윤서 씨의 애칭이었나요?”

“정확히는 윤서 씨가 한정훈 씨를 부르던 애칭이었다네. ‘아가페’는 조건 없는 사랑을 뜻하는 그리스어이지. 윤서 씨는 그를 그렇게 불렀다고 전해져. 그들의 사랑은 너무나도 아름다웠지만,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어. 한국 전쟁 발발 직전, 한정훈 씨가 징집되어 전선으로 떠났고, 그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지. 윤서 씨는 그가 남긴 피아노와 미완의 악보를 평생 간직하며, 그를 기다렸다고 해.”

피아노가 부르는 슬픈 노래

지우는 눈물이 그렁한 채 악보를 다시 바라보았다. ‘아가페에게 바치는 노래’. 이 곡은 한정훈이 윤서에게 바치려던, 그러나 끝내 완성하지 못한 마지막 사랑의 고백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피아노는, 두 사람의 슬프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오랜 세월을 견뎌온 증인이었다.

지우는 떨리는 손으로 미완의 선율을 다시 연주했다. 이번에는 음표 하나하나에 한정훈의 절절한 사랑과 윤서의 애절한 기다림이 서려 있는 듯했다. 피아노는 더 이상 공허한 소리를 내지 않았다. 깊은 슬픔과 아련한 추억, 그리고 이루지 못한 사랑의 아픔이 건반 위에서 되살아나는 듯했다. 지우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할머니가 그 피아노를 끝까지 간직했던 이유, 그 속에 담긴 깊은 사연을 이제야 비로소 이해할 것 같았다.

어쩌면 할머니는, 이 피아노를 통해 한정훈과 윤서의 잊혀진 사랑을 이어주고 싶었던 것일까? 혹은 그들의 미완의 선율을, 누군가가 언젠가 완성해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던 것일까? 낡은 피아노는 드디어 그 숨겨진 노래를, 슬픔과 사랑으로 얼룩진 선율을, 세상 밖으로 조금씩 내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노래는, 이제 지우의 마음속에서 새로운 의미로 피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