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겨울의 그림자가 마침내 물러서고 있었다. 산자락을 휘감았던 흰 눈은 지난밤 내린 보슬비에 녹아 눅눅한 흙 내음을 뿜어냈고, 얼었던 계곡물은 다시 졸졸거리며 봄의 노래를 시작했다. 윤서의 ‘달 그늘’ 찻집에도 미세하지만 확실한 변화의 기운이 감돌았다.
윤서는 조용한 마을의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 아래에 자리 잡은 찻집 안에서, 아침 햇살이 스며드는 창밖 풍경을 응시했다. 창가에는 누군가 심어 놓았을 작은 수선화들이 노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 노란빛이 얼어붙었던 윤서의 마음에도 작은 온기를 불어넣는 듯했다. 찻주전자에 끓인 물을 붓고 찻잎이 우러나는 동안, 윤서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겨울은 늘 윤서에게 길고 쓸쓸한 계절이었다. 얼어붙은 시간처럼, 그녀의 마음 한구석도 늘 과거의 어느 날에 멈춰있었다. 어릴 적 이 마을에서 나고 자라, 열아홉에 첫사랑을 떠나보낸 후로는 다른 곳으로 떠날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낡은 찻집을 물려받아 차분히 시간을 보내는 것이 그녀의 일상이었다.
문득, 창문 틈으로 스며들어온 봄바람이 실내를 가득 채웠다. 갓 피어난 복숭아꽃 향기와 흙 내음, 그리고 어딘가 모르게 아련한 그리움이 섞인 바람이었다. 그 바람은 찻집 선반 위에 꽂혀있던 낡은 책들을 가볍게 흔들고, 오래된 서랍장 위에 놓인 빛바랜 천 조각들을 스쳤다. 그리고 이내 창턱에 놓인 작은 나무 조각 하나를 살짝 밀어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어머.”
윤서는 조용히 중얼거리며 몸을 숙여 그것을 집어 들었다. 손안에 잡힌 것은 작고 섬세하게 조각된 나무 새 한 마리였다. 매끄럽게 다듬어진 나무의 질감, 섬세하게 표현된 날개와 부리. 세월의 흔적으로 색이 바래긴 했지만, 여전히 그 안에 담긴 정성과 아름다움은 그대로였다.
이것은 지훈이가 만들어준 것이었다. 열 살 때, 처음으로 칼을 잡고 서툴게 조각해 그녀에게 건네주었던 작은 선물. “윤서야, 네가 좋아하는 제비래. 날아가지 않도록 내가 잡아둘게.” 어설픈 약속과 함께 건네주던 그 조그만 손길이 아직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지훈이는 십 년 전, 아무런 말도 없이 마을을 떠났다. 그의 부모님이 급하게 이사를 가면서, 단 한 통의 편지도, 한마디 인사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 후로 윤서는 매년 봄이 되면 지훈이를 떠올리곤 했다. 봄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혹시 그의 소식이 전해져 올까 애태우며 기다렸다.
윤서는 나무 새를 손에 든 채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그와의 추억은 찻잔 속에 우러나는 차처럼 따뜻했지만, 동시에 쓰디쓴 여운을 남겼다. 그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잘 지내고 있을까. 이토록 오랫동안 답을 찾지 못한 질문들이 그녀의 마음을 맴돌았다.
그때였다. 찻집의 낡은 문이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문에 달린 작은 풍경이 청량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윤서는 화들짝 놀라 손안의 나무 새를 재빨리 주머니에 넣었다. 낯선 손님이었다. 이 작은 마을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세련된 외모의 젊은 남자였다. 깔끔한 정장 차림에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 그리고 날카로우면서도 어딘가 차분한 눈빛.
남자는 윤서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윤서 씨 되십니까?”
남자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그 한 마디에 윤서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낯선 이가 자신의 이름을 정확히 알고 찾아왔다는 사실이 그녀를 긴장시켰다. 혹시, 지훈이와 관련된 일일까 하는 막연한 예감이 그녀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네, 제가 윤서입니다만… 실례지만 누구신지?”
윤서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다. 남자는 윤서의 질문에 대답 대신 주머니에서 작은 명함 한 장을 꺼내 윤서에게 내밀었다. ‘해밀 법률사무소, 최현우 변호사’라는 이름이 박혀 있었다. 변호사? 윤서는 더욱 의아해졌다. 대체 무슨 일로 변호사가 자신을 찾아왔을까.
최현우 변호사는 윤서의 굳은 얼굴을 읽었는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실은, 김지훈 씨의 일로 찾아왔습니다.”
‘지훈이’. 그 이름이 다시금 그녀의 심장을 격렬하게 흔들었다. 십 년 동안이나 그토록 애타게 기다려왔던 이름이었다. 윤서는 저도 모르게 주머니 속 나무 새를 움켜쥐었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나무의 따뜻한 감촉이 오히려 그녀를 진정시키는 듯했다.
“지훈이가… 어떻게 됐나요?”
윤서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최현우 변호사는 윤서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김지훈 씨께서… 윤서 씨를 찾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에게서 윤서 씨께 전해달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의 손에서 또 다른 봉투 하나가 윤서에게 건네졌다. 평범한 흰 봉투였지만, 윤서의 손에 닿는 순간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봉투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지훈이의 소식. 봄바람이 전해준, 십 년 만의 소식이었다. 윤서는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받아 들었다. 그녀의 심장은 쿵쾅거렸고, 찻집 밖에서는 봄바람이 다시 한번 휘파람처럼 불어왔다. 새로운 계절이 가져다준 예측 불가능한 운명의 서막이 열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