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훈은 낡은 서랍을 열었다. 퀴퀴한 나무 냄새와 함께 먼지 쌓인 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안에는 바래고 빛바랜 사진들이 가득했다. 그의 손가락이 떨렸다. 마치 오래전 봉인된 시간을 깨뜨리는 의식처럼, 조심스럽게 사진들을 헤집었다.
어느새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손바닥만 한 작은 사진이었다. 푸른 하늘 아래, 꽃잎이 흩날리는 어느 공원 벤치에 앉아 밝게 웃고 있는 그녀, 이서연. 갓 스무 살이 되었을까, 풋풋함과 싱그러움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사진 뒷면에는 서툰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행복했던 우리. 2005년 5월, 벚꽃 공원에서.’
지훈은 그 사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2005년 5월. 벚꽃은 이미 진 계절이었다. 아마도 서연은 자신의 생일이 있던 5월을 기억하고 싶어 했을 것이다. 벚꽃 공원. 이름은 익숙했지만, 정확한 위치를 특정하기 어려웠다. 당시에는 비슷한 이름의 작은 공원들이 서울 곳곳에 많았다.
그러나 사진 속 서연의 미소는 마치 마법처럼 지훈의 마음을 붙잡았다. 잊고 싶어도 잊히지 않는, 가슴 깊이 새겨진 첫사랑의 잔상. 지훈은 그때의 자신과 서연이 함께 꾸었던 꿈들을 떠올렸다. 작은 공방을 열어 도자기를 만들고 싶어 했던 서연의 소망. 그리고 그 옆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겠다던 자신의 다짐.
“서연아, 너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흐릿한 눈으로 사진을 매만지던 지훈의 시선이 사진 구석에 멈췄다. 서연의 왼쪽 손목에 채워진 낡은 은색 팔찌. 그리고 그녀의 무릎 위에 놓인, 어딘가 익숙한 형태의 작은 도자기 인형. 그는 문득 오래전 서연이 즐겨 찾던 인사동의 작은 도예 공방을 기억해냈다. 그곳의 주인 할아버지가 서연에게 선물했던 것이 바로 저 인형이었다.
그는 즉시 차 키를 들고 일어섰다. 시간은 벌써 늦은 저녁이었지만, 지훈의 마음은 뜨겁게 타올랐다. 이성보다는 감성이 앞서는 순간이었다. 지훈은 인사동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찾은 인사동 거리는 여전히 활기찼지만, 어딘가 모르게 달라져 있었다. 번쩍이는 간판과 새로 생긴 가게들이 즐비했다.
지훈은 예전에 서연과 함께 손을 잡고 걷던 골목길로 들어섰다. 낡은 한옥들이 빼곡히 들어선 그곳에서 서연은 도자기 굽는 냄새를 맡으며 행복해하곤 했다. 그의 기억 속 공방은 돌담이 낮고 처마가 멋스러웠던 작은 한옥이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것은 현대적인 인테리어의 갤러리 카페였다.
지훈은 갤러리 카페 안으로 들어가 바리스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실례합니다. 혹시 이전에 이곳이 도예 공방이었던 것을 아시나요? ‘흙담 공방’이라고….”
젊은 바리스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여기는 저희가 오픈하기 전부터 이 건물이었던 걸로 아는데요? 최소 5년은 됐을 거예요. 그 전에는… 잘 모르겠네요.”
실망감이 지훈의 가슴을 짓눌렀다. 헛된 기대를 한 것일까. 그는 힘없이 카페를 나와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지자 쌀쌀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의 그림자만큼이나 그의 마음도 길고 어둡게 드리워졌다.
그때, 갤러리 카페 바로 옆, 허름한 골목 안쪽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간판도 없이, 그저 ‘고미술’이라는 낡은 나무 팻말이 걸려 있는 곳이었다. 지훈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오래된 책과 그림, 그리고 알 수 없는 골동품들의 냄새가 훅 끼쳐왔다. 가게 안은 먼지가 자욱했고, 온갖 잡동사니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누구세요?”
깊은 목소리가 들렸다. 가게 안쪽에서 흰 수염이 길게 자란 노인이 안경 너머로 지훈을 바라보았다. 노인의 눈빛은 날카로웠지만, 동시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연륜이 담겨 있었다.
“죄송합니다. 혹시 이 근처에 ‘흙담 공방’이라는 도예 공방이 있었던 것을 아시는지요? 한 15년 전쯤에요.” 지훈은 희미한 희망을 품고 물었다.
노인은 안경을 고쳐 쓰고 한참 동안 지훈을 쳐다보았다. “흙담 공방이라… 아, 김 선생 공방 말인가? 그 공방은 벌써 10년도 더 전에 문을 닫았지. 김 선생은 연세가 많으셔서 고향으로 내려가셨어.”
지훈의 심장이 다시 한번 크게 뛰었다. “그 김 선생이라는 분이 혹시 어떤 분이셨는지… 혹시 연락처 같은 것을 아실까요?”
노인은 혀를 쯧쯧 차며 말했다. “연락처는 모르지. 김 선생이 워낙 조용하신 분이라. 하지만 그분 고향은 전주였던 걸로 기억해. 가끔 인사동으로 도자기를 보내왔는데, 주소는 항상 전주였거든. 그리고 그 공방에 자주 드나들던 젊은 아가씨가 있었지. 머리가 길고, 웃을 때 눈꼬리가 예뻤어. 늘 도자기 만들 꿈을 꾸던 아가씨….”
서연이었다. 틀림없이 서연이었다. 지훈의 눈에 순간 이슬이 맺혔다. “그 아가씨도 혹시 전주로 내려갔을까요? 김 선생을 따라?”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모르지. 그 아가씨는 꿈이 많았어. 언젠가 프랑스로 유학 가서 도예를 공부하고 싶다고 했었지. 김 선생에게도 자주 이야기했어. 하지만 전주로 갔다는 소리는 못 들었네. 그래도 김 선생 고향이 전주라는 건 확실해. 아마 지금도 그곳 어딘가에서 조용히 도자기를 빚고 계실 거야.”
지훈은 노인에게 깊이 감사 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섰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빛났다. 전주. 막연했던 서연의 흔적이 이제는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차에 올라탔다. 피로가 몰려왔지만, 그의 마음은 새로운 희망으로 가득했다. 김 선생. 그분이 어쩌면 서연의 소식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 어쩌면 서연이 김 선생과 함께 전주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섞인 상상까지 했다.
오랜만에 가슴 속에서 잊었던 열정이 다시 타올랐다. 그는 내일 아침 일찍 전주로 향하기로 결정했다. 첫사랑을 찾아가는 길은 멀고 험난했지만, 지훈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이제 그에게는 전주라는 목적지가 생겼으니까.
그의 손은 여전히 서연의 사진을 꼭 쥐고 있었다. 사진 속 서연의 미소는 이제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그를 이끄는 등대가 되어 빛나고 있었다.
새로운 여정의 시작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