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는 낡은 책상 위, 빛바랜 사진 한 장을 응시했다. 사진 속 지수는 해맑게 웃고 있었다. 십여 년 전, 모든 것이 희미하고 또렷했던 그때의 지수. 어제 발견한 그녀의 고등학교 졸업 앨범은 오래된 먼지 속에 묻혀 있던 기억의 조각들을 휘몰아쳤다. 앨범 귀퉁이에 적힌 희미한 주소. 그것은 단순한 글자가 아니라, 잠들었던 심장에 다시 불을 지피는 성냥불 같았다.
차창 밖으로 스치는 도시 풍경은 정우의 복잡한 심경과 대조적이었다. 활기찬 도시는 변했지만, 정우의 마음속 시간은 멈춰 있었다. 졸업 앨범에 적힌 주소를 따라 도착한 곳은 재개발의 바람을 가까스로 피해 간 듯한 낡은 아파트 단지였다. 고층 빌딩 숲에 둘러싸여 홀로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채 서 있는 건물은, 마치 잊힌 존재처럼 보였다.
오래된 기억의 골목
정우는 익숙한 듯 낯선 아파트 복도를 걸었다. 심장이 발걸음에 맞춰 불규칙하게 뛰었다. 지수의 이름이 적혀 있던 호실의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낯선 중년 남성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맞았다. “누구시죠?”
정우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이전에 이곳에 이지수라는 분이 사셨나요?”
남성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했다. “이지수요? 글쎄요, 제가 이사 온 지 5년이 넘었는데, 그때부터 이지수라는 분은 없었는데요. 아주머니께 여쭤보시면 아실지도 모르겠네요.” 남성은 손가락으로 아래층을 가리켰다.
정우는 감사 인사를 전하고 아래층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흰 머리가 성성한 할머니 한 분이 문을 열어주셨다. 정우는 다시금 조심스럽게 지수의 이름을 꺼냈다. 할머니의 눈빛이 아련한 옛 기억을 더듬는 듯 흔들렸다. “이지수라… 아, 저 위층에 살던 지수 말이제? 참 예쁘고 똑똑했던 아이지. 그림 그리는 걸 참 좋아했어.”
정우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혹시 지수가 어디로 이사 갔는지 아시나요?”
“글쎄, 정확히는 모르지. 고등학교 졸업하고 얼마 안 돼서 부모님하고 같이 이사 갔어. 멀리 간다고는 들었는데… 아, 근데 지수가 그림 그리러 자주 가던 작은 공원 옆 서점이 있었지. 거기 할아버지라면 혹시 아실지도 몰라.” 할머니는 멀지 않은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빛바랜 서점, 살아있는 꿈
할머니의 말대로,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몇 걸음 걷자 작은 공원이 나타났다. 공원 벤치에 앉아있던 정우는 문득 오래된 기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푸른 잎사귀들이 햇살을 가르는 그늘 아래, 지수가 벤치에 앉아 스케치북에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정우야, 나 언젠가 꼭 나만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될 거야. 사람들이 내 그림을 보고 행복해지면 좋겠어.” 지수의 목소리에는 꿈과 열정이 가득했다. 정우는 그런 지수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네 그림은 분명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거야, 지수야.”
정우는 눈을 감았다 떴다. 그 약속 같던 말들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다. 공원 바로 옆에는 세월의 풍파를 고스란히 맞은 듯한 작은 서점이 보였다. ‘오래된 책방’이라는 간판은 거의 지워져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서점 문을 열었다.
낡은 나무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고서적 특유의 향기가 후각을 자극했다. 먼지 쌓인 책들이 빼곡히 들어찬 서가 사이로, 백발의 노인이 돋보기를 쓰고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정우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혹시 이지수라는 학생을 기억하시나요? 예전에 이 근처에 살았다고 들었습니다.”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깊게 팬 주름 사이로 형형한 눈빛이 정우를 응시했다. “이지수? 아, 기억하지. 이 작은 서점의 거의 유일한 단골손님이었지. 그림책과 시집을 특히 좋아했어. 종종 여기 와서 그림도 그렸고 말이야. 한동안 여기서 아르바이트도 했었지. 꿈이 컸던 아이였어.”
정우는 가슴이 조여 왔다. 맞았다. 그녀는 여전히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혹시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아시나요?”
“음… 정확히는 모르지만, 미술 공부를 더 깊이 하고 싶다며 인사동에 있는 어떤 큰 화랑을 찾아갔다고 들었네. ‘창’이라는 이름의 화랑이었던가? 그곳에서 일하며 배우고 싶다고 했던 것 같아. 그때 눈이 얼마나 반짝였는지…” 노인의 목소리에는 애틋함이 묻어 있었다.
인사동, 이름의 흔적
‘창 화랑.’ 정우는 지체 없이 인사동으로 향했다. 전통과 예술이 살아 숨 쉬는 인사동 거리는 활기로 가득했다. 수많은 갤러리 간판 사이를 헤매다, 마침내 현대적인 외관을 자랑하는 ‘창 화랑’을 발견했다.
화랑 안으로 들어서자, 모던한 분위기 속에 다양한 현대 미술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정우는 안내 데스크에 다가가 지수의 이름을 물었다. “이지수라는 분이 여기서 일하신 적이 있나요?”
안내원은 컴퓨터를 잠시 확인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이지수라는 이름은 여러 명 계십니다만, 현재 저희 화랑에 근무하는 분 중에는 찾기 어렵네요. 혹시 몇 년도에 근무하셨는지 아시나요?”
정우는 맥이 빠졌다. 너무 오래전 일이었다. 낙담한 채 화랑을 둘러보던 정우의 발걸음이 어느 작품 앞에서 멈춰 섰다.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홀로 서 있는 나무 한 그루가 그려진 풍경화였다. 캔버스 위에 펼쳐진 색채와 구도, 그리고 고독하지만 굳건한 분위기. 묘하게 지수의 그림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린 시절 지수가 그리던 풍경화와는 사뭇 다르지만, 그 깊이 있는 감성이 왠지 모르게 익숙했다.
그는 그림 옆에 붙은 작은 명패를 응시했다.
‘작가: 이지수 (Lee Jisu)’
숨이 턱 막혔다. 심장이 다시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흔한 이름이었지만, 이 느낌은 분명… 그는 그 아래 작은 작가 약력을 읽어 내려갔다. ‘어린 시절 [이전 아파트 단지 이름]에서 성장…’
손이 떨려왔다. 확신이 들었다. 그녀가 맞았다. 그녀는 정말 자신의 꿈을 이루고 있었다. 그림은 강렬했고, 성숙했으며, 젊은 시절의 순수함에 깊은 사색이 더해진 듯했다. 그는 약력 마지막 줄에서 그녀의 현재 활동지를 발견했다. ‘현재 제주도에서 작품 활동 중.’
그녀가 여기에 있었지만, 동시에 너무나 멀리 있었다. 다시금 희미해지는 듯한 지수의 그림자를 좇아, 정우는 발걸음을 돌렸다. 출구로 향하던 중, 옆에서 들려오는 직원들의 대화 소리가 그의 발길을 붙잡았다.
“이지수 작가의 제주도 개인전 말이야? ‘잃어버린 시간의 조각들’이라는 제목이라던데…”
정우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섰다. 잃어버린 시간의 조각들. 마치 그 자신을 위한 메시지 같았다. 그의 눈빛은 다시 한번 타오르는 불꽃처럼 강렬하게 빛났다. 제주도. 그녀의 흔적은 이제 또 다른 섬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그 조각들을 찾아 반드시 그녀에게 닿으리라 다짐했다. 잃어버린 첫사랑, 그 조각들의 행방을 찾아 그는 또다시 긴 여정을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