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첫사랑을 찾는 탐정 – 제6화

잊혀진 캔버스 위로

김지훈은 낡은 종이 한 장을 손에 쥐고 있었다. 빗물이 스며 얼룩진 졸업 전시회 팸플릿이었다. 최은서의 이름 옆에는 그녀의 작품 제목과 함께 그녀가 사사했던 교수의 이름이 희미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이현수 교수. 그의 마지막 희망이 점멸하는 곳이었다.

새벽 안개가 채 걷히지 않은 이른 아침, 지훈은 모교의 예술대학 건물 앞에 섰다. 붉은 벽돌의 낡은 건물은 20년 전의 기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더 고요하고, 쓸쓸하게 느껴졌다. 그의 가슴은 기대로 인해 불안하게 울렁거렸다. 과연 은서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 혹은, 또다시 희망 없는 절벽에 서게 될까?

시간의 흔적

이현수 교수의 연구실은 건물 가장 안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복도에는 먼지 냄새와 오래된 물감 냄새가 섞여 있었다. 지훈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몇 번의 침묵 끝에, 안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지훈은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은서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언급했다. 잠시 후,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칠순이 훌쩍 넘었을 법한 노교수가 안경 너머로 지훈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깊게 패여 있었으나, 눈빛만은 예리하고 생기가 넘쳤다.

“최은서라고요… 그 아이 이름을 오랜만에 듣는군. 들어와요.”

연구실 안은 마치 시간의 박물관 같았다. 벽면 가득 쌓인 책들과 캔버스, 그리고 햇빛 바랜 그림들이 가득했다. 오래된 물감 냄새가 더욱 짙게 풍겨왔다. 교수는 지훈에게 앉으라고 권한 뒤, 차를 한 잔 내어주었다. 따뜻한 차가 지훈의 손에 닿자 얼어붙었던 긴장이 조금 풀리는 듯했다.

“최은서를 찾는다고 했지? 그 아이는 졸업 후 바로 유학을 떠났지. 재능이 아까워서 내가 적극적으로 추천했으니까.”

지훈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유학이라니. 그는 은서가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을 것이라 막연히 짐작하고 있었다.

“어느 나라로 갔는지 혹시 아십니까?”

교수는 찻잔을 들고 창밖을 내다봤다. 늦가을의 캠퍼스는 앙상한 나뭇가지들로 가득했다.

“프랑스였을 거야. 파리의 어느 유명한 학교로 간다고 했었지. 그 후로는 연락이 뜸해졌어. 가끔 소식이 들려오긴 했지만… 몇 년 전부터는 완전히 끊겼네.”

완전히 끊겼다… 그 말은 지훈의 가슴에 또다시 먹먹한 통증을 안겼다. 그토록 멀리 있었던가. 그토록 오랜 시간, 단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던 이유가.

어느 예술가의 초상

“그 아이는 그림을 정말 사랑했어. 색을 다루는 방식이나, 붓질 하나하나에 영혼이 담겨 있었지. 특히 빛을 표현하는 데 탁월했어. 마치 잃어버린 조각을 찾는 사람처럼, 항상 무언가를 갈망하는 눈빛이었지.”

교수의 목소리에는 은서에 대한 애정과 안타까움이 동시에 묻어났다. 그는 책상 서랍을 뒤적여 낡은 스케치북 하나를 꺼냈다.

“이건 은서가 졸업하기 직전에 그렸던 스케치야. 늘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스케치북이었지.”

지훈은 조심스럽게 스케치북을 받아 들었다. 표지는 닳아 헤져 있었지만, 안에 담긴 그림들은 생생했다. 익숙한 풍경들이 흑백의 연필 선으로 섬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맨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자, 지훈의 눈은 크게 뜨였다.

그곳에는 지훈의 뒷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대학 시절, 도서관 창가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그의 모습. 은서만이 알 수 있는 각도, 그 시절의 그만이 가질 수 있던 미세한 어깨선의 기울기. 그림 속의 지훈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순간, 지훈은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은서도 자신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증거, 어쩌면 자신보다 더 깊이.

“이 그림은…” 지훈은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아이는 사랑하는 사람을 그릴 때 특히 몰입했지. 대상을 깊이 이해하고 사랑해야만 나올 수 있는 그림이야.” 교수는 담담하게 말했다. “한때는 파리에서 작은 전시회도 열었다는 소식을 들었어. 반응도 좋았다고 하더군. 그런데 그 후로…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니. 그 말은 지훈의 심장을 다시 한번 얼어붙게 했다. 유학을 가서 성공적인 활동을 펼치다가 홀연히 사라진 은서라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혹시… 은서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닐까요?” 지훈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교수는 한숨을 쉬었다. “나도 그게 마음에 걸렸네. 마지막으로 소식이 끊기기 전, 그녀의 작품 분위기가 확 바뀌었거든. 빛과 희망으로 가득했던 그림들이… 점차 어둡고 강렬하게 변했지. 마치 내면의 고통을 토해내려는 듯이. 그리고 그녀의 이름으로 된 그림 몇 점이 파리의 한 작은 경매에 나왔다는 소문도 들었네. 그것도 아주 헐값에. 그녀답지 않은 행동이었지.”

미궁 속의 그림자

지훈은 스케치북을 가슴에 품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희망과 불안이 뒤섞여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은서가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크나큰 위로였지만, 그녀의 행방이 더욱 미궁 속으로 빠져든 것만 같았다. 그녀는 왜 갑자기 사라졌을까? 왜 그녀의 작품들이 헐값에 경매에 나왔을까? 파리. 그곳이 그녀의 마지막 흔적이자, 새로운 시작점이 될 것이었다.

“교수님, 혹시 은서가 유학 시절에 연락했던 친구나 동료는 없을까요? 아니면 그녀의 작품을 소장했던 화랑이나 컬렉터의 정보라도…”

교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음… 직접적인 연락처는 모르겠지만, 은서가 특히 의지했던 선배가 한 명 있었네. 박혜진이라고. 그녀도 파리에서 유학 중이었고, 은서를 많이 챙겨줬지. 지금은 한국으로 돌아와 홍대에 작은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다는 소식을 얼핏 들은 것 같군. 혹시 그 아이라면 은서의 근황을 좀 더 자세히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

박혜진. 새로운 이름, 새로운 실마리. 지훈의 눈빛에 다시 한번 불꽃이 타올랐다. 파리로 가는 길은 멀고 험난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할 수 없었다. 이 스케치북 속에 담긴 미소와 함께, 그는 은서가 여전히 어딘가에서 숨 쉬고 있음을 확신했다. 그리고 그 숨결이 아픔으로 얼룩져 있다면, 반드시 찾아내 그녀를 지켜줄 것이라고 다짐했다.

교수에게 정중히 인사를 올린 지훈은 연구실을 나섰다. 늦가을 햇살이 캠퍼스에 쏟아지고 있었지만, 그의 발걸음은 파리의 잿빛 하늘을 향해 있었다.

잃어버린 첫사랑을 찾아 떠나는 그의 여정은 이제 막 국경을 넘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