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창문 너머로 스며들었다. 따스하지만 아직은 여린 봄볕은 오랜 세월의 먼지를 걷어낸 듯 방 안을 감싸 안았다. 지은은 동생 하준의 방에 서 있었다. 그가 떠난 지 햇수로 십 년, 지은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 없이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지만, 방 안 가득 배어 있는 시간의 흔적은 지울 수 없었다. 삐걱거리는 낡은 마루 틈새로, 창가에 놓인 낡은 망원경 아래로, 그리고 빛바랜 벽지 위로 하준의 숨결이 맴도는 것만 같았다.
며칠 전, 봄바람이 실어다 준 작은 소식 하나가 지은의 얼어붙었던 마음에 미세한 균열을 냈다. 오래된 책갈피 속에서 발견된 하준의 삐뚤빼뚤한 그림 한 장. 그 그림 속에는 그들이 어렸을 적 자주 가던 숲 속 작은 오두막과, 그 위를 비추는 유난히 밝은 별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단순한 어린아이의 낙서처럼 보였지만, 그림 뒷면에 적힌 짧은 문구는 지은의 심장을 다시 뛰게 했다. ‘누나, 별이 부르는 곳에서 기다릴게.’
지은은 망원경을 어루만졌다. 하준은 어릴 적부터 별을 좋아했다. 밤하늘의 무수한 빛들을 보며 미지의 세계를 꿈꾸는 소년이었다. 지은은 하준의 꿈을 응원했지만, 현실은 언제나 녹록지 않았다. 그들이 부모님을 잃고 홀로 남겨진 후, 지은은 가장으로서 모든 무게를 짊어져야 했고, 하준은 그 무게 속에서 점점 더 깊은 자신의 세계로 침잠해 들어갔다. 결국, 스무 살이 되던 해 봄, 하준은 한 마디 말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이후로, 그의 소식은 어떤 바람도 전해주지 않았다.
그림 한 장이 가져온 희미한 희망은 지은의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죄책감과 그리움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어쩌면 자신이 하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건 아닐까, 그의 외로움을 알아채지 못했던 건 아닐까 하는 후회. 지은은 망원경을 창가에 가져다 대고 밖을 내다보았다. 연둣빛 새싹들이 돋아나는 언덕 너머로, 멀리 마을 어귀가 보였다. 그곳에서 하준의 그림이 가리키는 ‘별이 부르는 곳’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그때, 낡은 대문이 삐걱이는 소리가 들렸다. 지은은 놀라 몸을 돌렸다. 예상치 못한 방문객이었다. 마당으로 들어서는 낯선 그림자. 하지만 이내 그 모습이 익숙한 젊은 남자의 얼굴로 변하자, 지은의 심장은 더욱 크게 울렸다. 준호였다. 하준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하준이 사라진 후 두 번 다시 마을에 나타나지 않았던 그였다.
“지은 누나, 오랜만이에요.”
준호는 여전히 수줍은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에는 세월의 흔적과 함께 알 수 없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지은은 그를 집 안으로 안내했다. 어색한 침묵이 차분하게 끓어오르는 찻물 소리와 함께 방안을 채웠다. 준호는 하준이 즐겨 앉던 창가 자리에 앉아,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마치 과거를 더듬는 듯 아련했다.
“어떻게… 지냈니?” 지은이 먼저 침묵을 깼다. “갑자기 웬일이야?”
준호는 찻잔을 들고 한 모금 마신 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잠시 내려왔어요. 누나 소식도 들리고, 이 집 불 켜진 걸 보니… 찾아와 보고 싶었어요.”
지은은 준호의 말에서 ‘하준’이라는 이름을 기대했지만, 그는 그 단어를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계속해서 하준의 방 쪽을 향하는 것을 지은은 놓치지 않았다. 지은은 마음을 다잡고 하준의 그림을 준호에게 내밀었다.
“이거, 하준이가 그린 거야. 이 그림… 혹시 기억나니?”
준호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그림을 받아 들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림 속 오두막과 별을 번갈아 보며 그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 오두막… 맞죠? 마을 뒤편 숲에 있던… 지금은 거의 폐허가 되었겠지만요.” 준호의 목소리는 희미했지만, 그 속에서 잊고 있던 기억의 조각들이 떠오르는 듯했다.
“응. 우리 어렸을 때 비밀기지라고 부르던 곳. 그런데 이 별은… 무슨 의미일까? ‘별이 부르는 곳에서 기다릴게’라고 뒷면에 쓰여 있었어.” 지은은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준호는 그림을 다시 내려놓고 씁쓸하게 웃었다. “하준이는 늘 그랬어요. 이 세상에 자기 혼자 동떨어진 별에서 온 것 같다고. 그래서 자기만의 별을 찾고 싶어 했죠. 저희가 학교 다닐 때, 이 그림에 나오는 별이 사실은… 마을 도서관에 있던 낡은 천문학 책에 나오는 별자리랑 똑같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도서관?” 지은의 눈이 커졌다. “어떤 책?”
“정확히 기억은 안 나요. 너무 오래돼서. 하지만 하준이가 늘 그 책을 들여다보며 신기한 이야기를 해줬어요. ‘시리우스’였나? 아니면… ‘베텔게우스’였나? 별자리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특정 별에 대한 이야기였을 거예요. 그리고 그 책을 볼 때마다 늘 도서관 구석의 작은 서재로 숨어들어갔죠.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 자기만의 우주라고요.” 준호는 조심스럽게 기억을 더듬었다.
지은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왜 하준이가 사라진 후에야 이런 작은 단서들을 얻게 되는 걸까. 준호는 지은의 불안한 눈빛을 읽었는지, 조용히 말을 이었다.
“하준이는… 누나를 정말 좋아했어요. 하지만 동시에 누나에게 짐이 되는 것 같다고, 그래서 미안하다고 늘 말했었어요. 누나에게 보답할 수 있는 방법은, 누나가 걱정하지 않게 자기만의 별을 찾는 거라고요. 그러기 위해서 잠시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 말은 지은의 가슴을 후벼 팠다. 하준의 말 못 할 고민과 죄책감을 전혀 헤아리지 못했다는 사실에 눈물이 핑 돌았다. 지은은 애써 눈물을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준호야. 네 덕분에… 하준이를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준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나… 하준이 꼭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하준이는 늘 약속을 지키는 아이였으니까요.”
준호가 돌아간 후, 지은은 망설이지 않고 집을 나섰다. 낡은 마을 도서관은 어릴 적 추억 속 모습 그대로였다. 책장 가득한 오래된 책 냄새, 먼지 앉은 창문, 그리고 고요한 침묵. 지은은 준호가 말했던 ‘도서관 구석의 작은 서재’를 찾았다. 사람들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듯,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섞인 낡은 종이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천문학 코너는 예상대로 낡고 먼지가 가득했다. 지은은 하준의 그림과 준호의 말을 되새기며 책장 사이를 헤매었다. 어떤 별이었을까? 시리우스? 베텔게우스? 어린 하준이 말했던 ‘자기만의 별’이 숨어있는 책. 지은은 손때 묻은 낡은 책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별자리 도감’, ‘우주의 신비’, ‘행성 이야기’… 수많은 제목들이 그녀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다 지은의 손이 멈췄다. 가장 구석진 곳, 거의 보이지 않게 꽂혀 있던 낡은 책 한 권. 표지는 헤지고, 제목은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희미했지만, 지은은 묘한 끌림을 느꼈다. 책을 꺼내자, 책장 뒤편으로 작은 틈새가 드러났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만들어 놓은 듯한, 책 한 권이 겨우 들어갈 만한 비밀 공간.
지은은 조심스럽게 손을 넣어 그 안의 것을 꺼냈다. 낡은 가죽 커버의 작은 수첩이었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그 수첩을, 지은은 떨리는 손으로 열었다. 첫 페이지에, 익숙한 하준의 글씨가 정성스럽게 적혀 있었다.
‘사랑하는 누나에게.’
지은의 눈가에 뜨거운 것이 맺혔다. 마치 먼 과거로부터 온 편지처럼, 하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수첩 속에는 하준이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기록했던 별들의 이야기, 그가 꿈꾸었던 미지의 세계, 그리고 그 안에 숨겨두었던 외로움과 희망들이 빼곡히 담겨 있었다. 그리고 맨 마지막 페이지에는 한 장의 오래된 기차표가 끼워져 있었다. 목적지는… 지은이 전혀 알지 못하는 낯선 도시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다시 한번, 하준의 글씨가 쓰여 있었다.
‘누나, 이제 나의 별을 찾았어. 이제 누나를 부를게.’
봄바람이 도서관의 낡은 창문을 두드렸다. 창문 틈으로 들어온 햇살이 수첩의 글씨를 비췄다. 지은의 심장은 격렬하게 요동쳤다. 이것이 바로 봄바람이 전해준 마지막 소식, 아니,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소식이었다. 그녀는 수첩을 가슴에 안고, 하준의 별을 찾아 떠날 준비를 했다. 이제 그녀가 하준을 부를 차례였다. 멀리 떨어진 그 별이, 지은의 부름에 응답해주기를 바라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