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첫사랑을 찾는 탐정 – 제8화

낡은 수첩 속 희미한 주소를 따라 도착한 곳은 도시의 변두리, 시간이 멈춘 듯한 오래된 주택가였다.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자 좁은 골목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었고, 낮은 담장 너머로는 붉은 기와지붕들이 서로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지훈은 낡은 차에서 내려 주머니 속 사진을 다시 확인했다. 흙먼지 쌓인 골목을 따라 한참을 걸었지만, 그가 찾는 이은채의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짙은 회색빛 구름이 하늘을 가득 메워 곧 비라도 쏟아질 듯 먹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그의 마음도 그 하늘처럼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훈은 마지막 희망을 걸고 허름한 대문 앞에 섰다. 녹슨 문패에는 오래전에 지워진 글자들이 간신히 자국만 남아 있었다. 망설임 끝에 초인종을 눌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포기하려던 찰나, 옆집 대문이 삐걱 소리를 내며 열렸다. 허리 굽은 할머니 한 분이 살며시 고개를 내밀었다. 조심스럽게 마당을 쓸던 할머니의 눈길이 지훈에게 머물렀다.

“누구를 찾아왔어요?” 할머니의 목소리는 잔잔한 개울물 같았다.

지훈은 조심스럽게 은채의 사진을 내밀었다. “혹시 이 사람을 아시는지요? 예전에 이 근처에 살았다고 들었습니다.”

할머니는 돋보기 너머로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주름진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지는가 싶더니, 이내 쓸쓸한 표정이 스쳤다. “아이고, 이 아가씨….”

지훈의 심장이 격렬하게 울렸다. 단 한마디였지만, 할머니의 말 속에는 은채를 아는 듯한 확실한 기색이 담겨 있었다. “아십니까? 이름은 이은채입니다.”

할머니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알지. 한 5년쯤 됐나? 이 옆집에서 혼자 살았었어. 얼굴도 예쁘고 마음씨도 고운 아가씨였는데….”

지훈은 다급하게 물었다. “어떻게 지냈는지 혹시 아시나요? 언제쯤 떠났는지….”

할머니는 먼 곳을 응시하는 눈빛으로 기억을 더듬는 듯했다. “매일 저녁이면 저기 골목 끝에 있는 작은 책방에 가곤 했지. 늘 책을 끼고 살았어.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얼굴이 너무 안 좋더라고. 밤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는 날이 많았고, 가끔 보면 창문 밖을 불안한 눈빛으로 살피는 것 같았어.”

불안한 눈빛. 그 단어가 지훈의 뇌리를 강타했다. 단순한 실종이 아닐 수도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혹시 어떤 불안함이었는지 짐작 가는 것이 있으신가요? 누군가 찾아오거나, 안 좋은 일이 있었을까요?”

할머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뭘 알겠니. 그저 안쓰럽다는 생각만 들었지. 그러다 어느 날 아침, 문득 보니 집이 비어 있더구나. 짐도 그대로고, 아무 말 없이 사라졌어.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그녀가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사라졌다는 말은 지훈의 가슴을 후벼 팠다. 은채가 어떤 이유로 사라져야만 했는지, 그 불안의 실체가 무엇인지 더욱 궁금해졌다. 할머니는 잠시 침묵하다가,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 그 아가씨가 책방에 자주 가면서 나한테 이걸 맡겨뒀던 적이 있어. 혹시라도 급한 일 생기면 대신 전해달라고 했었는데, 결국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서….”

할머니는 집 안으로 들어가더니 낡은 나무 상자 하나를 들고 나왔다. 상자 안에는 빛바랜 손수건과 함께 작은 은색 머리핀이 들어 있었다. 촘촘한 꽃잎 문양이 새겨진 그 머리핀은 지훈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이었다. 은채가 늘 머리에 꽂고 다니던, 그가 직접 선물했던 머리핀이었다.

지훈은 떨리는 손으로 머리핀을 받아 들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그의 손끝을 타고 심장으로 전해졌다. “이 머리핀… 제가 선물했던 겁니다.”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나왔다. “이걸… 어디서 찾으신 건가요?”

할머니는 지훈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느 날 아침, 아가씨가 이 머리핀을 내게 주면서, 혹시 ‘다시 오지 못하게 되면 이걸 꼭 보관해 달라고’ 했었어. 그러면서 다른 누군가에게 주어야 할 것이 있다면서, 아주 오래된 책 한 권을 같이 건네주었지.”

지훈의 심장이 다시 한번 크게 요동쳤다. “책이요? 어떤 책이었습니까?”

“음… 표지가 아주 낡고 해진, 무슨 시집이었던 걸로 기억해. 아가씨가 늘 들고 다니던 책이었지. 그걸 저 골목 끝 책방 주인에게 맡겨달라고 했었어. 혹시 찾는 사람이 있으면 그 책을 전해달라고. 그 이후로 아가씨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고.”

할머니의 말은 한 줄기 빛이면서 동시에 거대한 벽이었다. 은채가 남긴 마지막 흔적. 그리고 그 흔적이 가리키는 곳은 바로 그 오래된 책방이었다. 지훈은 할머니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곧장 골목 끝 책방으로 향했다.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고, 심장은 불안과 기대감으로 미친 듯이 뛰었다.

낡은 책방 문을 열고 들어서자, 오래된 종이 냄새와 먼지 냄새가 뒤섞인 공기가 지훈을 맞이했다. 수많은 책들이 빼곡하게 꽂힌 서가 사이를 지나, 그는 조심스럽게 책방 주인에게 다가갔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돋보기를 쓴 채 책을 읽고 있었다. 지훈은 은채의 사진과 함께 할머니가 맡겨주었다는 머리핀을 내밀었다.

“혹시… 이 은채라는 아가씨를 아십니까? 혹시 이 머리핀과 함께 맡겨놓은 책이 있다고 하던데요.”

책방 주인은 돋보기 너머로 지훈과 머리핀을 번갈아 보았다. 그의 얼굴에 잠시 놀란 기색이 스치더니, 이내 깊은 회상에 잠겼다. “이 머리핀… 분명히 그 아가씨 것이 맞네. 자주 왔었지. 마지막으로 여기에 왔을 때, 특별히 부탁한 책이 한 권 있었네. 아무에게도 주지 말고, 오직 ‘이 머리핀을 아는 사람’에게만 전해달라고 했었지. 꼭 찾아올 사람이 있을 거라고.”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낡은 서가 깊숙한 곳에서 한 권의 책을 꺼냈다. 표지가 너덜너덜해지고 모서리가 닳아버린 낡은 시집이었다. 겉모습만 보아도 오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지훈은 책을 받아 들었다. 묵직한 무게감이 그의 손바닥에 전해졌다. 책을 펼치자, 빛바랜 종이 위에 은채의 작은 글씨로 쓰인 쪽지가 한 장 끼워져 있었다.

‘지훈에게. 만약 이 책이 당신 손에 닿는다면, 나는 아마 당신 곁을 떠나 아주 먼 곳에 있겠지. 하지만 기억해 줘. 당신을 사랑했다는 것을.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나의 선택이 아니었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내가 남길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다음 페이지에 있어.’

지훈의 눈앞이 흐려졌다. 은채의 글씨였다. 그의 심장이 찢어지는 듯 아파왔다. 그녀가 스스로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니. ‘선택이 아니었다’는 말에 그의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 찼다. 떨리는 손으로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자세히 보니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리고 그 구멍 안에는 아주 작게 접힌 또 다른 쪽지가 숨겨져 있었다.

쪽지를 펼치자, 예상치 못한 장소의 이름과 함께 짧은 암호 같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너무나도 익숙한 그녀의 필체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곳에서.’

지훈은 쪽지를 꽉 움켜쥐었다. 은채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감춰졌거나, 혹은 어떤 거대한 비밀 속으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를 향한 그녀의 마지막 메시지, 그리고 새로운 단서. 이 모든 것이 마치 잃어버린 조각들을 맞추듯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이제, 그녀가 남긴 암호 같은 메시지를 해독하고, 그 단서가 가리키는 곳으로 향해야 할 때였다. 그녀는 살아있었다. 그리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쩌면… 위험한 곳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