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계절의 그림자
새벽 공기에는 씁쓸한 후회가 섞여 있었다. 지훈은 창밖으로 희미하게 물드는 동녘을 바라보며 밤새 잠 못 이룬 눈을 깜빡였다.
침대 머리맡에는 낡은 사진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앳된 얼굴의 남매가 해맑게 웃고 있는 사진.
사라진 동생, 수아. 그리고 그녀를 찾아 헤맸던 오랜 세월.
그는 이제 수아를 찾았다. 꿈을 파는 상점에서 간절히 원했던 ‘재회’의 꿈을 사서.
하지만 현실은 그 꿈이 약속했던 찬란한 빛과는 너무나 달랐다.
그는 수아를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이제 ‘지훈의 동생 수아’가 아니었다.
행복해 보였다. 새로운 가족, 새로운 삶, 그리고 그 속에 완벽하게 융화된 미소.
그 미소 속에는 지훈과의 추억 한 조각도, 과거의 슬픔 한 조각도 담겨 있지 않은 듯했다.
꿈은 그에게 수아의 존재를 알려주었지만, 그녀의 잃어버린 기억까지 되돌려주지는 않았다.
그저 손에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과거의 그림자가 되어 그녀를 바라보는 고통을 안겨줄 뿐이었다.
지훈의 가슴속에는 미어지는 아픔과 함께,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밀려왔다.
과연 이 모든 것이 옳은 일이었을까? 그의 이기적인 바람이 그녀의 새로운 평화를 방해하는 것은 아닐까?
그녀는 자신을 알지 못하는 지금이 더 행복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지훈은 숨 쉬기조차 힘들었다.
그는 수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지만, 동시에 눈을 감아버리고 싶었다.
이 고통스러운 재회를 되돌릴 수 있다면, 그 어떤 대가라도 치를 용의가 있었다.
그리고 그 대가를 치를 수 있는 유일한 곳을 그는 알고 있었다.
밤의 장막이 드리운 상점
어스름이 내린 저녁, 지훈은 발걸음을 재촉해 익숙하면서도 낯선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낡은 간판조차 없는, 밤에만 희미한 빛을 내는 그곳. ‘꿈을 파는 상점’.
문은 언제나 그랬듯 미묘한 빛을 흘리고 있었다.
문고리를 잡는 손에 주저함이 스쳤다. 이곳은 그에게 희망을 주었지만, 동시에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안겨준 곳이었다.
깊은 숨을 들이쉬고, 지훈은 조용히 문을 열었다.
딸랑- 하는 종소리 대신, 찰랑거리는 유리구슬들의 맑은 소리가 그를 맞았다.
상점 내부는 여전히 신비로운 기운으로 가득했다.
벽을 가득 채운 유리병 속에는 다양한 빛깔의 꿈들이 부유하고 있었고,
은은한 향은 오래된 나무와 잊힌 추억의 냄새를 머금고 있었다.
지훈의 눈은 자연스럽게 상점 안쪽, 낡은 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는 할머니에게로 향했다.
할머니는 고개를 들지 않고도 지훈의 방문을 알고 있었다는 듯, 나지막이 말했다.
“또 오셨군요, 젊은이. 이번엔 어떤 꿈을 원하시오?”
지훈은 할머니의 목소리에서 늘 그랬듯 깊이를 알 수 없는 연륜을 느꼈다.
“할머니… 저는… 꿈을 사러 온 것이 아닙니다.”
그의 목소리는 떨렸다. “제가 샀던 꿈 때문에… 제 동생은… 행복하지만, 저는 괴롭습니다.”
할머니는 뜨개질하던 손을 멈추고 지훈을 응시했다.
그녀의 눈은 깊은 우물 같았다. 그 안에는 수많은 삶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는 듯했다.
“꿈은 양날의 검과 같지요. 얻고 싶은 것을 얻게 해주지만, 그 대가로 다른 것을 잃게 만들 수도 있으니.”
할머니의 말은 그의 심장을 꿰뚫는 듯했다.
대가와 선택의 무게
“저는… 제 꿈을 되돌리고 싶습니다. 아니, 차라리… 제 동생의 평화를 위해 제가 가진 무언가를 내어주고 싶습니다.”
지훈은 주먹을 꽉 쥐었다. “제가 수아를 찾은 것이 오히려 그녀의 삶에 방해가 될까 두렵습니다.
제가 아는 수아가 아니더라도, 그녀가 행복하다면… 저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다만, 그녀가 혹시라도 저 때문에 흔들릴까 봐… 그래서 제가 그녀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질 수 있다면…”
할머니는 지훈의 간절한 눈빛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사라진다구요… 모든 추억이 사라지는 것을 감당할 수 있겠소?”
“그녀가 행복할 수 있다면요…” 지훈의 목소리는 애원하는 듯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그녀와의 모든 기억, 추억…
그것들을 팔아서라도, 그녀의 삶이 완벽하게 유지될 수 있게 해주세요.”
할머니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발걸음은 노인답지 않게 가볍고도 단호했다.
그녀는 상점 중앙에 놓인 거대한 유리 테이블로 향했다.
테이블 위에는 아직 내용물이 없는, 투명한 유리병 하나가 놓여 있었다.
“기억을 파는 일은 쉬운 결정이 아닙니다, 젊은이.
한 번 팔린 기억은 되돌릴 수 없으며, 당신의 존재는 그녀의 세상에서 영원히 지워질 것입니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지훈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머릿속에는 수아와의 어린 시절, 함께 뛰어놀던 강가,
비 오는 날 낡은 우산 하나에 몸을 욱여넣고 뛰어가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것들은 그의 삶을 지탱해온 유일한 빛이었다. 그 빛을 스스로 끄라는 말인가.
하지만 동시에, 멀리서 바라본 수아의 행복한 얼굴이 그의 결심을 다잡았다.
그녀의 평온을 위해, 그는 기꺼이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었다.
“각오했습니다, 할머니.” 지훈은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그녀의 평화를 위해서라면, 저는 기꺼이… 저의 모든 것을 내어놓겠습니다.”
할머니는 지훈을 테이블 앞으로 이끌었다.
“그럼, 당신의 가장 소중한 기억을 이 병에 담으시오.”
그녀는 테이블 위 투명한 병을 가리키며 말했다.
“단, 오직 당신의 진심만이 이 병을 채울 수 있습니다.
억지로 담으려 한다면, 오히려 당신의 영혼이 부서질 수도 있습니다.”
지훈은 병을 조심스럽게 들었다. 병은 차갑고 비어 있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수아의 웃음소리, 작은 손을 잡고 걸었던 골목길,
두려움에 떨던 밤, 그의 품에 안겨 잠들었던 여린 숨결…
그의 기억 속 수아는 너무나 선명하고 따뜻했다.
그 기억들을 놓는다는 것은,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행복을 위해, 그는 이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하려 했다.
지훈이 병을 가슴에 품고 마음속으로 수아와의 추억을 하나씩 되새기며 놓아주려 하자,
병 안에서 희미한 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푸른빛과 은색 빛이 뒤섞여 마치 작은 별들이 병 속에 갇힌 듯 반짝였다.
그 빛은 점점 강해지며, 지훈의 손을 타고 그의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듯했다.
그것은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이상하게도 평화로운 감각이었다.
마치 찢어지는 상처에 차가운 물을 붓는 듯한.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병은 눈부신 빛으로 가득 찼고, 지훈의 얼굴은 땀으로 번들거렸다.
그의 눈에는 알 수 없는 공허함이 드리워져 있었다.
병을 내려놓자, 할머니가 조용히 병을 집어 들었다.
“기억은 이제 이 안에 있습니다.” 할머니가 말했다.
“당신은 이제 당신의 선택을 완수했습니다.”
지훈은 멍하니 병을 바라보았다. 그 빛나는 유리병 속에 그의 모든 과거가, 수아와의 유대가 담겨 있었다.
이제 그는 자유로워진 것일까? 아니면 영원히 잃어버린 것일까?
그는 더 이상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는 듯했다.
상점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은, 마치 자신의 그림자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위태롭고 쓸쓸해 보였다.
텅 비어버린 가슴으로 밤거리를 걷는 지훈.
그의 발걸음은 무거웠지만, 동시에 한없이 가벼운 듯했다.
그는 이제 어떤 길을 걸어가게 될까?
그리고 그의 결정이 수아에게는 과연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밤은 깊어지고, 꿈을 파는 상점의 문은 다시 미묘한 빛을 흘리며 다음 손님을 기다리는 듯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