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 제18화

겨울의 정점이었다. 창밖은 이미 해가 진 지 오래였고, 희미한 가스등 아래로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지아는 낡은 재즈가 흐르는 카페 구석 자리에 앉아,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 따뜻함이 제 몸 속 차가움을 녹여줄 수 있을 거라 믿는 것처럼, 그녀의 시선은 허공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시작된 불규칙한 통증은 이제 그녀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 한 켠이 조여오는 듯한 답답함은 그녀를 점점 더 깊은 심연으로 밀어 넣었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 혼자 버텨내야 한다고, 그래야만 그가 아프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을 세뇌하고 있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래서 멀어져야만 했다.

그때, 카페 문이 열리며 찬 공기와 함께 한 그림자가 들어섰다. 지아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온몸의 세포가 그의 존재를 알아차린 듯 반응했다. 탁, 탁, 탁. 규칙적인 그의 발걸음 소리가 그녀의 심장 박동과 겹쳐졌다. 이젠 도망칠 곳조차 없었다.

“지아.”

낮고 단호한 목소리. 그 속에는 애끓는 절규와 수많은 의문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끝내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가 테이블 건너편 의자를 끌어당겨 앉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그들의 사이에는 좁은 테이블 하나와 수년 간 쌓아 올린 오해와 침묵의 벽만이 존재했다.

“왜 연락을 피했어?” 도현의 목소리는 한층 더 가라앉아 있었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 말이라도 해 줘. 이렇게 아무 설명 없이 사라지는 게 네 방식이야?”

지아는 그제야 찻잔을 내려놓았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잘못한 건 없어. 그냥… 헤어지자고 했을 뿐이야.”

“헤어져?” 도현은 기막힌 듯 실소를 터트렸다. “우리가 어떤 사이였는데, 그렇게 간단히 말할 수 있는 말이야? 네가 그날,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 내게 했던 약속들은 다 뭐였는데?”

‘약속.’ 그 단어가 지아의 심장을 날카롭게 꿰뚫었다. 하얗게 부서지던 눈송이들 아래, 그의 손을 잡고 영원을 맹세했던 그날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의 눈동자에 비치던 자신은 더없이 행복했고,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은 그저 시들어가는 그림자에 불과했다.

“그건 다 지난 일이야. 우리에겐 미래가 없어.” 지아는 애써 차가운 목소리를 냈다. 시선은 여전히 테이블 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미래가 없다고?” 도현은 참을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주변의 시선이 그들에게 쏠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도현은 개의치 않았다. “내가 그걸 인정할 것 같아? 내가 너에게 줬던 마음이 고작 그 정도라고 생각해? 지아, 내 눈을 봐.”

그녀는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도현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뜨거웠다. 그 속에는 걱정과 분노, 그리고 지울 수 없는 사랑이 뒤섞여 파도치고 있었다. 그 사랑이 그녀의 방패를 부수고 들어와 아픈 가슴을 흔들었다. 그녀는 눈가가 시큰거리는 것을 느꼈다. 안 돼, 여기서 무너지면 안 돼.

“이젠 네가 버거워. 네 사랑, 다 부담스러워.” 지아는 목이 메이는 것을 억누르며 가장 잔인한 말을 골라 내뱉었다. “더 이상 네 옆에 있고 싶지 않아. 도현아, 이젠 그만해.”

도현의 얼굴에서 순간적으로 핏기가 사라졌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아는 그 틈을 타 다시 고개를 숙이려 했지만, 그의 손이 그녀의 턱을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붙잡았다. 그리고 그의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 한 방울을 닦아냈다.

“거짓말.” 그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훨씬 나지막했지만, 그 어떤 외침보다도 강렬했다. “네가 날 버겁다고 할 리 없어. 네가 날 부담스러워할 리 없어. 그리고… 네가 날 떠나면서 이렇게 울 리 없어.”

지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가면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그를 밀어내기 위해 쌓아 올렸던 모든 거짓말들이, 그의 한 마디에 무너져 내렸다.

“네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내가 알잖아.” 도현의 눈빛은 그녀의 가장 깊은 곳을 꿰뚫고 있었다. “두려운 거지? 네가 아플까 봐, 내가 널 지켜주지 못할까 봐. 그래서 혼자 다 감당하려고 하는 거지?”

그의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박혔다. 숨겨왔던 고통과 두려움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지아는 결국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흐느낌은 곧 격렬한 오열이 되어 카페 안을 울렸다. 그는 말없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여전히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미안해… 도현아… 미안해…” 지아는 고개를 숙인 채 그의 손등에 눈물을 떨구었다. “네 옆에서 점점 병들어가는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어… 너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어…”

그제야 도현은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 설명할 수 없었던 거리감, 그리고 그의 품에서 느껴졌던 미세한 떨림까지. 그녀는 자신을 위해, 혼자서 그 고통을 감당하려 했던 것이다.

“짐이라니.” 도현은 천천히 몸을 숙여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의 목소리는 울음을 참는 듯 떨렸다. “내가 너에게 짐이 되라고 약속했니? 내가 너에게 혼자 아파하라고 약속했어? 기억 안 나?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 우리는 무엇이든 함께 하기로 약속했어. 기쁠 때도, 슬플 때도, 그리고 아플 때도…”

그의 손이 그녀의 가슴팍에 닿았다. 희미하게 그녀의 심장 박동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네가 아프면, 나도 아파. 네가 혼자 울면, 난 더 고통스러워. 넌 내게 짐이 아니라… 내 세상 전부야, 지아.”

지아는 흐릿한 시야 너머로 도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변함없는 사랑과 깊은 슬픔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토록 혼자 싸워야 한다고 믿었던 고통이, 그의 눈빛 속에서 녹아내리는 듯했다. 차가웠던 그녀의 손에 그의 온기가 스며들었다. 창밖에는 여전히 눈꽃이 흩날리고 있었다. 그 날의 약속처럼, 혹은 다시 시작될 새로운 약속처럼.

“그러니까, 이제 그만 혼자 아파해. 내가 널 지킬게. 어떤 시련이 와도, 이번엔 절대 놓지 않을 거야.” 도현은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의 품은 놀랍도록 따뜻하고 굳건했다. “우리 함께 이겨내자. 제발, 지아.”

그의 품에서 지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어깨가 다시 한 번 격렬하게 떨려왔다. 이제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이 지독한 고통 속에서도, 어쩌면 작은 희망의 빛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녀의 마음속에 번졌다. 어쩌면 그 겨울 눈꽃 아래서 했던 약속은, 아직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 한켠에는 여전히 불안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이 고통스러운 여정의 끝은 과연 어디일까. 그들은 과연 그 약속을 지켜낼 수 있을까. 차가운 눈발은 밤새도록 하염없이 내렸다. 그들의 약속처럼, 끝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