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겨울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하윤은 숨을 들이쉴 때마다 희뿌연 입김이 눈앞에 서렸다가 이내 사라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손에 든 낡은 스케치북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그녀의 심장은 뜨거웠다. 며칠 밤낮으로 잠을 설쳤다. 꿈속에서도, 깨어난 현실에서도 지훈의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그의 사라짐에 대한 진실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서 있는 곳은 한때 지훈의 작업실이었던 허름한 건물 앞이었다. 오래전부터 비어있던 이 건물은 유리창이 깨지고 벽에는 담쟁이덩굴이 무성하게 자라 흡사 유령의 집 같았다. 하지만 하윤에게 이곳은 지훈과의 추억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성지였다. 눈꽃이 흩날리던 어느 날, 지훈이 그녀에게 고백하며 미래를 약속했던 바로 그 장소. 그러나 그 약속 이후, 지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윤은 망설임 없이 굳게 닫힌 철문을 열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삭막한 적막을 깨트렸다. 안으로 들어서자, 차가운 냉기가 더욱 그녀를 감쌌다. 먼지 덮인 작업대, 캔버스 틀, 굳어버린 물감 자국들. 모든 것이 시간을 멈춘 듯 지훈이 떠난 그 날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끝이 작업대를 스쳤다. 마치 그의 온기가 아직 남아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문득, 그녀의 시선이 작업대 아래쪽의 삐걱거리는 서랍에 닿았다. 왠지 모를 이끌림에 서랍을 열자, 그 안에는 낡은 종이상자가 하나 들어있었다. 상자 위에는 지훈의 글씨로 ‘하윤에게’ 라고 적혀 있었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지훈이 남긴 것이 분명했다. 오랜 시간 그녀가 찾아 헤매던, 어쩌면 진실의 조각이 담겨 있을지도 모르는 상자였다.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먼지 앉은 붓 몇 개와 마른 물감, 그리고 얇은 일기장과 함께 작은 나무 조각품 하나가 들어있었다.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는 작은 새 모양의 조각품이었다. 지훈이 그녀를 위해 직접 깎아 만들어 주었던 수많은 새들 중 하나였다. 언제나 그녀를 떠나지 않고 곁에 머물겠다는 그의 무언의 약속 같았다. 하윤은 떨리는 손으로 나무 새를 쥐었다. 차가운 나무 조각에서 그의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그리고 일기장. 표지는 낡았지만, 내용은 선명했다. 펼쳐보니 익숙한 지훈의 글씨체가 빼곡했다. 하지만 단순히 일기가 아니었다. 마지막 몇 페이지는 일반적인 기록이 아닌, 어딘가 급하게 쓰인 듯한 글씨체로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 페이지에 끼워져 있는, 한 장의 얇은 편지. 봉투도, 발신인도 없었다. 그저 얇은 종이에 연필로 꾹꾹 눌러 쓴 글씨만이 남아있었다.
하윤은 숨을 죽이며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글자는 그의 고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듯 비틀려 있었다.
하윤아, 미안하다.
이 편지를 네가 발견할 때쯤이면, 나는 이미 너의 곁에 없을 것이다. 겨울 눈꽃이 내리던 그 날, 나는 너에게 영원히 함께할 것을 약속했지만… 동시에 나는 너를 영원히 떠나야 하는 잔인한 약속을 해야 했다.
김회장. 그는 너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너의 그림을 좋아하고, 너의 미소를 사랑하며, 너와 함께하는 미래를 꿈꾼다는 것을. 그리고 그는 그 모든 것을 나의 약점 삼아 나를 옥죄어 왔다. 네 아버지의 사업, 너의 등록금, 너의 미래. 이 모든 것을 지켜줄 수 있는 대가로, 그는 나에게 너의 곁을 떠나라고 했다. 영원히, 흔적도 없이 사라지라고.
나는 너를 지키기 위해 떠날 수밖에 없었다. 네가 나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어. 이기적인 나를 용서하지 마라. 너를 사랑해서 떠난다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다. 다만, 너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음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너에게 했던 모든 약속들은 진심이었다. 언젠가 다시 너의 곁으로 돌아가, 모든 것을 말하고 다시 시작하고 싶다. 그때까지 부디, 건강하게 지내줘. 행복해야 한다. 나의 유일한 사랑…
편지가 끝나자, 하윤의 손에서 힘없이 종이가 미끄러져 내렸다. 그녀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편지의 내용은 그녀의 모든 의문들을 한순간에 해소시켜주었지만, 동시에 그녀의 심장을 산산조각 내는 비수와 같았다.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그것은 단순히 그들만의 약속이 아니었다. 지훈이 그녀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맺은, 슬프고도 잔인한 맹세였던 것이다.
김회장. 그 이름이 그녀의 뇌리를 강타했다. 지훈의 가족에게 끊임없이 압력을 가하고, 그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려 했던 그림자 같은 존재. 그녀는 어렴풋이 그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그가 지훈과 자신 사이에 이토록 거대한 장벽을 세웠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지훈이 떠난 것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나 사랑했기에 자신을 버린 선택이었다는 사실이 그녀를 더욱 아프게 했다.
하윤은 무릎을 꿇었다. 작업실의 차가운 바닥이 그녀의 무릎을 파고들었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목이 메어왔고,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지난 몇 년간 그녀를 짓눌렀던 원망과 그리움이 한순간에 회한으로 변했다. 지훈은 그녀를 버린 것이 아니었다. 그녀를 위해 자신을 버렸던 것이다. 그 고통을 홀로 감당하며 얼마나 힘들어했을까. 그녀는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원망했던 지난 시간을 후회했다.
한참을 그렇게 울던 하윤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에는 절망 대신 굳은 결의가 서려 있었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기다리거나 슬퍼할 수 없었다. 지훈이 자신을 위해 희생했다면, 이제는 그녀가 그를 구할 차례였다. 김회장. 그에게 지훈을 돌려달라고 요구해야 했다. 그의 협박과 위협에 맞서, 잃어버린 사랑을 되찾아야 했다.
하윤은 나무 새를 다시 움켜쥐었다. 차가웠던 나무 조각에서 이제는 지훈의 굳건한 의지와 희생의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그녀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한 곳을 향했다. 김회장의 사무실. 그곳으로 가야 했다. 그가 어떤 인물인지, 얼마나 거대한 권력을 가졌는지 이제는 두렵지 않았다. 지훈이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버렸듯, 그녀 또한 그를 위해 모든 것을 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낡은 작업실을 나서는 하윤의 뒷모습은 더 이상 약하고 흔들리는 여인이 아니었다. 차가운 겨울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흩날렸지만, 그녀의 걸음은 단호했다. 겨울 눈꽃은 여전히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 하얀 눈송이들은 그녀의 어깨 위에 내려앉아 녹아내렸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이제 뜨거운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지훈과의 약속, 그리고 이제는 그녀가 지켜야 할 그의 희생. 그 모든 것을 되돌려 놓기 위한 그녀의 새로운 싸움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하윤은 길을 걸으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김회장의 비서실 번호를 찾아 다이얼을 눌렀다. 그녀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지만, 그 안에는 강철 같은 의지가 담겨 있었다.
“김회장님을 뵙고 싶습니다. 한하윤입니다.”
고요한 겨울 거리, 눈꽃은 춤추듯 흩날렸다. 그 아래, 한 여인의 운명이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