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가는 눈꽃
지훈은 창밖을 응시했다. 밤은 깊었고,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어지러이 춤추던 눈송이들은 어느새 빗방울로 변해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녹아내리는 눈처럼, 서윤의 생명력 또한 그렇게 서서히 스러져가고 있었다. 그의 심장은 무거운 돌덩이를 매달아 놓은 듯, 고통스럽게 죄어왔다. 몇 년 전, 온 세상이 하얀 눈꽃으로 뒤덮였던 그날, 그는 서윤의 손을 잡고 맹세했다. 어떤 시련이 닥쳐도, 어떤 절망이 찾아와도 그녀의 곁을 지키고, 함께 이 겨울을 넘어서리라고. 영원히 함께 눈꽃을 맞이하리라고. 그 약속은 그의 삶의 전부였고, 이제 그 약속은 마치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지훈 씨, 지금 괜찮으세요?”
늦은 시간까지 사무실에 남아 있던 동료 태준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물었다. 지훈은 애써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입꼬리는 비틀렸다.
“응, 괜찮아. 할 일이 좀 남아서.”
태준은 지훈의 눈빛에서 깊은 슬픔을 읽었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서윤의 상태를 알고 있었다. 모두가 그녀의 쾌유를 빌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의 빛은 더욱 멀어져 가는 듯했다.
지훈은 다시 창밖을 보았다. 빗줄기는 더욱 거세지고 있었고, 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마치 그들의 겨울처럼.
절망의 그림자
새벽 두 시, 맹렬히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지훈은 잠에서 깨어났다. 발신인은 병원. 그의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것 같았다. 이미 수없이 반복된 악몽 같은 순간이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이 박사님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속에는 숨길 수 없는 비통함이 배어 있었다.
“지훈 씨… 서윤 씨 상태가 급격히 안 좋아졌습니다. 아무래도… 면역 반응이 더 이상 치료를 버텨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지훈의 귀에 이 박사님의 말은 웅웅거리는 소음처럼 들렸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맨발로 바닥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새도 없이 계단을 두 칸씩 뛰어 내려갔다. 온몸이 부서질 것 같았지만, 그의 발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병원으로 향하는 내내, 눈앞에는 서윤의 환한 미소와, 병마에 시달려 야윈 그녀의 얼굴이 교차했다. 그 모든 순간마다, 하얀 눈송이가 배경처럼 휘날리는 그날의 약속이 아득하게 울렸다.
응급실 앞에는 초췌한 이 박사님이 서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패여 있었고, 눈빛은 피로와 함께 안타까움을 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지훈 씨. 저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습니다. 하지만 서윤 씨의 몸이 더 이상 약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생명 유지가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지훈은 벽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세상이 온통 회색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 그의 머릿속은 ‘마지막’이라는 단어로 가득 찼다. 그날의 약속은, 그 모든 희망은, 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다른 방법은… 정말 없는 겁니까? 이 박사님. 제발… 뭐라도… 해보세요.”
지훈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애원하는 듯했다. 이 박사님은 깊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아주 희박한 가능성이 있는 치료법이 하나 있기는 합니다. 극히 위험하고, 아직 임상 단계에 있는… 그러나 현재로서는 유일한 길입니다.”
지훈의 눈빛에 희미한 불씨가 되살아났다. “그게 뭡니까? 뭐든지 하겠습니다. 제가 가진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이 박사님은 지훈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새로운 유전자 재조합 치료입니다. 특정 유전자를 변형하여 면역 반응을 억제하고, 손상된 세포를 복구하는 방식이죠. 문제는 아직 성공 사례가 극히 드물고, 심각한 부작용을 동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치료는 특정 유전자형을 가진 사람에게서만 얻을 수 있는 특수 물질을 필요로 합니다. 그 유전자형은 너무나 희귀해서…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적합한 기증자를 찾지 못했습니다.”
지훈의 가슴이 다시 무너져 내렸다. 희망은 한 줄기 빛처럼 스쳐 지나갔고, 다시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는 고개를 떨궜다.
그때, 머릿속에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기억이 있었다. 몇 년 전, 서윤이 병명을 알게 된 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둘이 함께 찾아갔던 한 시골의 작은 연구소. 그곳에서 만났던 괴짜 과학자는 비슷한 설명을 하며, 언젠가 자신의 연구가 완성되면 세상의 모든 희귀병을 고칠 수 있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었다. 당시에는 헛된 꿈처럼 들렸던 이야기였다. 하지만 지금, 이 절망적인 순간에, 그 기억이 지훈의 뇌리를 강타했다.
그 연구소, 그 괴짜 과학자. 어쩌면… 어쩌면 그곳에 마지막 희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미친 생각이 들었다.
다시 새겨진 약속
지훈은 겨우 몸을 일으켜 서윤이 있는 중환자실로 향했다. 무균복을 입고 유리창 너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창백한 얼굴, 가늘게 이어진 호흡기, 수많은 선들이 그녀의 여린 몸을 감싸고 있었다. 서윤은 너무나 작고 연약해 보였다. 그러나 그 속에는 세상 그 무엇보다 강한 생명력이 잠재되어 있음을 지훈은 알고 있었다.
그는 손바닥을 유리창에 댔다. 차가운 유리가 그의 열을 흡수했다. 마치 그들의 겨울처럼.
‘서윤아… 기억나? 우리가 그날 약속했던 거. 첫눈이 오면 같이 산에 오르기로 했던 거. 네가 제일 좋아하는 눈꽃을 보러 가자고 했잖아. 그때 내가 말했지? 어떤 어려움이 와도, 내가 널 지킬 거라고.’
그날, 하얀 눈밭에 서서 서로의 손을 잡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약속을 주고받았다. 그녀는 병마와 싸우는 와중에도 눈처럼 순수하게 웃으며 말했다. “지훈아, 우리 꼭 행복해지자. 무슨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말자.”
그녀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포기하지 마, 서윤아. 절대 포기하지 마. 내가… 내가 널 포기하지 않을 거야. 마지막까지, 너의 곁을 지킬 거야.”
지훈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눈에는 이미 사라진 눈꽃처럼 아련한 눈물이 고였다. 이 박사님이 말한 유전자 치료법, 그리고 오래전 방문했던 그 비밀스러운 연구소. 모든 것이 하나의 실타래처럼 엉켜 지훈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괴짜 과학자의 연구는 정식 승인을 받지 못했고, 그 때문에 자금난과 윤리적 문제로 폐쇄되었다고 들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세상은 그의 약속을 비웃는 듯했지만, 지훈은 고개를 들었다. 차가운 유리에 손을 떼고 돌아섰다. 그의 얼굴에는 절망 대신, 굳건한 결의가 서려 있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든, 어떤 위험을 감수하든, 그는 그 약속을 지켜낼 것이다. 설령 그것이 그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일일지라도.
그는 휴대폰을 꺼내 손가락으로 익숙한 번호를 찾았다. 오래전 헤어진 동료, 과거 그 연구소와 끈끈한 관계를 가졌던 유진의 번호였다. 망설임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둠 속에서 그의 결심만이 선명하게 빛났다.
서윤아, 약속했잖아.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 영원히 함께하자고. 내가 너를 반드시 구해낼게. 그 약속을 위해, 나는 어떤 길이라도 갈 거야.
병원의 차가운 복도를 걸어 나가는 그의 뒷모습은, 마치 거친 폭풍 속으로 뛰어드는 전사 같았다. 밤은 아직 깊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다시금 하얀 눈꽃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피할 수 없는 싸움의 시작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