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낡은 일기장 – 제20화

낡은 일기장의 얇고 누렇게 바랜 종이 위에는 할머니의 섬세한 글씨체가 바람처럼 흘러 있었다. 지혜는 익숙해진 그 글씨를 손가락으로 가만히 쓸어보았다. 제19화에서 멈췄던 페이지, 그 위에 쓰인 마지막 문장은 지혜의 심장을 조용히 움켜쥐는 듯했다.

“…그때, 나는 알았다. 나의 모든 계절은 그 사람과 함께 멈춰 있다는 것을. 허락되지 않은 사랑이었지만,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는, 내 삶의 가장 찬란한 죄였다. 북악산 자락, 그 작은 연못가 버드나무 아래서, 우리는 영원을 약속했건만… 바람은 어찌 그리 야속하게 우리를 갈랐던가.”

지혜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할머니가 이 일기장을 써 내려갔을 그 시절, 감히 상상하기도 어려울 만큼 엄격했던 시대에 할머니에게 이런 ‘찬란한 죄’가 있었다니. 지혜는 할머니의 차분하고 단아했던 모습 뒤에, 뜨겁게 타올랐던 열정의 불꽃이 있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북악산 자락, 작은 연못가 버드나무 아래…’

할머니는 그 장소를 여러 번 언급했었다. 어린 시절, 할머니와 손을 잡고 산책했던 기억 속에도 북악산 어딘가에 ‘버드나무 연못’이라 불리던 곳이 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희미했다. 지혜는 할머니가 생전에 그 연못을 바라볼 때마다 어떤 감회에 젖어들었을지 이제야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일기장 속에는 그 ‘그 사람’에 대한 더 이상의 구체적인 언급은 없었다. 이름도, 얼굴도, 심지어 그들이 왜 헤어져야 했는지에 대한 명확한 이유도 없었다. 그저 절절한 그리움과 체념만이 진하게 배어 있었다. 마치 할머니 스스로도 그 기억을 더듬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 붓을 멈춘 것처럼.

그날 밤, 지혜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할머니의 이루지 못한 사랑이 그녀의 마음속에 강렬한 파문처럼 퍼져나갔다. 무엇이 할머니를 그렇게 아프게 했을까? 그리고 그 ‘그 사람’은 과연 누구였을까? 살아있다면 지금쯤 몇 살이 되었을까? 아니, 살아있기는 할까?

다음 날 아침, 지혜는 망설임 없이 옷을 갈아입었다. 그녀는 북악산으로 향하기로 결심했다. 할머니가 남긴 그리움의 흔적을, 자신의 발로 직접 찾아보고 싶었다. 그것이 할머니의 일기장을 통해 할머니를 더 깊이 이해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찾은 북악산은 여전히 고요하고 웅장했다. 지혜는 기억을 더듬어 예전에 할머니와 함께 걸었던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초여름의 푸르름이 싱그럽게 피어나는 숲길은 바람의 속삭임과 새들의 지저귐으로 가득했다. 지혜의 발걸음은 조심스러웠지만, 동시에 무언가에 이끌리는 듯 확신에 차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인적이 드문 곳에 이르자, 희미하게 물비린내가 풍겨왔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버드나무들이 축 늘어진 가지를 흔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저곳이 바로 할머니가 말한 그곳일까. 기억 속보다 훨씬 더 작고 초라해진 연못이었지만, 그 모습은 할머니의 일기장 속 한 장면처럼 선명하게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연못 주변으로는 아무도 없었다. 물은 맑았지만, 연꽃은 이미 지고 없었다. 지혜는 버드나무 아래 돌계단에 앉아 물끄러미 연못을 바라보았다. 할머니와 ‘그 사람’이 이곳에서 어떤 대화를 나누고, 어떤 눈빛을 교환했을까. 그들의 젊은 날의 사랑과 이별의 아픔이 이 작은 연못 속에 잠겨 있는 듯했다.

지혜는 주머니에서 일기장을 꺼내들었다. 할머니의 글씨가 마치 지금 막 쓰인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때, 지혜의 눈에 연못가 돌담 틈새에 박혀 있는 작은 표식이 들어왔다. 누군가 새겨 넣은 듯한 희미한 문양이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나뭇잎 모양의 작은 조각이 박혀 있었다. 일기장 구석에서 보았던 할머니의 작은 서명 같기도 했다. 지혜는 손으로 그 조각을 쓸어보았다.

그때였다. 등 뒤에서 누군가의 낮은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지혜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한 노인이 지팡이에 의지한 채 그녀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백발이 성성한 그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깊은 주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눈빛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의 한 손에는 낡은 그림 스케치북이 들려 있었다.

“아가씨, 이 연못을 찾아오는 젊은이는 오랜만이군. 혹시, 길을 잃었소?” 노인이 조용히 물었다. 목소리에는 연륜이 묻어 있었다.

지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길을 잃은 건 아니에요. 할머니의 일기장을 읽다가… 이곳이 궁금해서요.”

노인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할머니의 일기장이라… 혹시, 오랫동안 이곳을 찾아오셨던 그… 이여사님 손녀인가?”

지혜의 심장이 다시 한번 크게 울렸다. 이여사님? 할머니의 성이 이씨였으니, 맞는 것 같았다. 이 노인은 할머니를 알고 있었다! “네… 저희 할머니가 이희정 여사님이세요.”

노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그 미소 속에는 깊은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연못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이희정… 그랬지. 참으로 고운 이름이었네. 나는 박선우라고 하네. 이 연못을 드나들며 그림을 그리는 늙은이일 뿐이지만… 희정 여사님과는 인연이 있었지.”

지혜는 놀라움과 함께 알 수 없는 감격에 휩싸였다. 할머니의 일기장이 이렇게 살아있는 인연으로 이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인연이요…?”

“그럼. 이곳은 우리에게 아주 특별한 장소였거든. 아가씨 할머니는… 이곳에서 한 남자를 만나 사랑했고, 또 이별했지.” 박선우 노인의 시선은 연못 속 깊은 곳을 응시하는 듯했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것을 옆에서 지켜보았던 친구였다네.”

지혜는 숨을 죽였다. 바로 눈앞에서 할머니의 비밀스러운 과거의 문이 활짝 열리는 순간이었다. “할아버지… 그럼 할머니의 ‘그 사람’은… 누구였나요?”

박선우 노인은 잠시 침묵했다. 그의 눈가에 이슬이 맺히는 듯했다. 그는 천천히 손에 들고 있던 낡은 스케치북을 펼쳤다. 그 안에는 수많은 풍경화와 인물화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맨 앞 페이지, 오래되어 색이 바랬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한 여성의 초상화가 지혜의 눈에 들어왔다.

“이 사람이… 자네 할머니 희정이었네.” 노인은 떨리는 손으로 초상화를 가리켰다. 그리고 그 옆 페이지로 넘기자, 또 다른 남자의 초상화가 나타났다. 날카롭지만 따뜻한 눈매, 굳게 다문 입술. 그 옆에는 한자로 ‘한재호’라는 이름이 조용히 쓰여 있었다.

“이 사람이… 희정이의 ‘그 사람’이었다네. 내 가장 친한 벗이었지. 그리고… 너의 할머니가 평생을 그리워했던 남자였다.”

박선우 노인은 엷게 미소 지었지만, 그 미소는 금방 사라졌다. 그의 시선은 다시 연못 속을 헤매는 듯했다. “희정이와 재호는 이곳에서 만나 사랑했고, 또 다시 이곳에서 기약 없는 이별을 했다네. 희정이가 너희 할아버님과 혼인하게 되면서, 재호는 홀로 고향을 떠나 먼 곳으로 향했지. 희정이는 그 후로도 가끔 이곳에 와서 재호를 그리워하곤 했어. 그때마다 나는 이 버드나무 아래에서, 희정이가 오길 기다리곤 했지.”

지혜는 할머니의 젊은 시절의 초상화와, 이름 석 자만 남은 ‘그 사람’의 초상화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할머니의 일기장 속에서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던 이름, 한재호.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재호는… 어떻게 되었나요? 혹시 지금도 살아계신가요?” 지혜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박선우 노인은 고개를 들고 지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 알 수 없는 회한과 슬픔이 가득했다. “재호는… 몇 해 전, 먼 타지에서 홀로 세상을 떠났다네. 내게 마지막으로 남긴 것이 있어. 자네 할머니에게 전해주지 못했던… 한 통의 편지였다네.”

지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편지? 할머니가 평생을 그리워했던 그 남자에게서 온 편지라고?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야, 이렇게 오래된 비밀이 세상에 드러나다니. 지혜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박선우 노인은 스케치북에서 얇고 빛바랜 봉투 하나를 조심스럽게 꺼내 지혜에게 내밀었다. 봉투 위에는 할머니의 이름, 이희정 석 자가 또박또박 쓰여 있었다. 그리고 봉투 한쪽 귀퉁이에는 할머니가 연못가 돌담에 새겨 놓았던 것과 똑같은 나뭇잎 모양의 작은 조각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이… 재호가 희정이에게 남긴 마지막 마음이었다네. 희정이는 이 편지의 존재를 모르고 세상을 떠났지. 이제 자네가 이것을 보관해주게. 그리고… 자네가 할머니의 일기장을 통해 얻은 마음의 답을 찾아가게나.”

지혜는 떨리는 손으로 편지 봉투를 받아 들었다. 할머니의 이루지 못한 사랑, 그리고 이제는 세상에 없는 두 사람의 절절한 인연이 이 작은 봉투 안에 담겨 있었다. 봉투의 촉감은 차갑고 단단했지만, 그 안에서 타오르는 그리움의 열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지혜는 편지를 가슴에 품고 박선우 노인에게 깊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노인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다시 스케치북을 펼쳤다. 그의 시선은 다시 버드나무 연못으로 향했다. 지혜는 그곳을 떠나면서도 여러 번 뒤를 돌아보았다. 노인의 모습이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그녀는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북악산의 바람이 그녀의 뺨을 스쳤다. 지혜는 품속의 편지를 더욱 단단히 움켜쥐었다. 할머니의 일기장이 마침내 새로운 진실을 드러낸 것이다. 이제 이 편지 속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할머니의 삶 속에 숨겨져 있던 또 다른 슬픔, 혹은 희망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지혜의 가슴은 기대와 불안으로 먹먹해졌다. 그녀는 이제, 이 편지를 열어볼 용기를 찾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