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겨울의 잠에서 깨어난 봄바람은, 메마른 나뭇가지 끝에 새싹을 틔우고 얼어붙었던 강물에 잔물결을 일으키듯, 지우의 잊힌 마음에 작은 파문을 던졌다. 그 파문은 겉으로는 미미해 보였으나, 안으로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동요를 불러일으켰다. 봄바람이 전해준 소식은 너무나도 선명해서, 마치 오래된 흑백사진에 갑자기 색깔이 입혀진 것 같았다. 그 소식은 민준의 귀환이었다. 그가,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지우는 낡은 일기장을 펼쳤다. 바래고 너덜너덜해진 종이 위에는 꾹꾹 눌러쓴 글씨들이 시간의 흐름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그 시절의 지우는 웃음이 많았고, 눈물 또한 쉽게 흘리던 여린 아이였다. 일기장 속에는 민준의 이름이 수없이 등장했다. 그의 장난스러운 미소, 나른한 오후의 햇살 아래 함께 걷던 길, 벤치에 앉아 나누던 풋풋한 꿈들. 모든 것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먼지처럼 일어나는 과거의 조각들이 그녀의 눈앞을 아른거렸다.
“정말 괜찮을까?”
지우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은 예상보다 더 초췌했다. 몇 날 며칠을 밤새 뒤척인 흔적이었다. 만남을 약속한 시간은 두 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그녀는 옷장 문을 열었다. 어떤 옷을 입어야 할까. 너무 꾸민 듯한 인상도, 그렇다고 너무 무심한 듯한 인상도 주고 싶지 않았다. 이 상황 자체가 너무나도 어색하고, 너무나도 어렵게 느껴졌다.
십 년이라는 시간은 짧지 않았다. 그 시간 동안 지우는 수많은 계절을 겪어냈고, 아픈 이별을 견뎌냈으며, 삶의 굴곡을 헤쳐 나오며 단단해졌다. 더 이상 꿈 많고 나약했던 스무 살의 지우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민준이라는 이름 앞에서는 그 모든 단단함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는 것 같았다. 그의 목소리 한마디, 그의 눈빛 한 조각만으로도 과거의 감정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아니 어제보다 더 생생하게 현재를 침범해오는 듯했다.
결국, 지우는 가장 무난하고 편안한 원피스를 선택했다. 옷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이 만남을 통해 무엇을 얻고,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가였다. 봄바람이 창밖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가 마치 그녀의 흔들리는 마음을 대변하는 듯했다. 그 바람은 소식을 전해주었지만, 그 소식이 가져올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새로운 계절의 시작을 알릴 뿐이었다.
약속 장소는 오래된 동네 어귀에 자리한 작은 찻집이었다. 우리가 함께 드나들던 그 찻집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벚꽃나무는 이제 막 연분홍빛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곱고 여린지, 마치 기다림 끝에 피어나는 희망 같았다.
지우는 찻집 문을 열었다. 낡은 나무 문이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열리자, 익숙하면서도 낯선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따뜻한 차 향기와 함께 오래된 나무의 정취가 뒤섞인 냄새였다. 찻집 안은 생각보다 한산했다. 창가 쪽 테이블에 앉은 몇몇 손님들이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본능적으로 안쪽 구석 자리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 그가 있었다.
민준. 이름 석 자를 소리 없이 되뇌었다. 십 년이라는 시간이 그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익숙한 그의 옆모습, 살짝 구부정한 어깨선, 창밖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하지만 동시에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시간이 새겨놓은 깊은 흔적들이 옅게 남아 있었고, 더 이상 장난기 가득하던 소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눈빛은 어딘가 모르게 쓸쓸해 보였다.
지우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듯한 압박감에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과거의 기억들이 발밑에 깔려 부서지는 것 같았다. 그녀의 존재를 아직 눈치채지 못한 민준은 여전히 창밖의 벚꽃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벚꽃나무도 우리처럼 오랜 시간을 견뎌내고 다시 꽃을 피웠을까. 아니면, 우리의 시간은 벚꽃처럼 다시 만개할 수 없을 만큼 이미 저물어버린 걸까.
지우는 그의 테이블 앞에 섰다.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민준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지우와 마주쳤을 때, 십 년이라는 세월이 순간적으로 정지하는 것 같았다. 그의 눈빛에 담긴 놀라움과 반가움, 그리고 미안함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들을 지우는 읽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속에서도 똑같은 파도가 일렁였다.
“민준아.”
그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지우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다. 그 떨림은 차가운 봄바람이 전해준 소식의 시작이자, 어쩌면 끝을 알리는 신호일지도 몰랐다. 찻집 안의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오직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십 년 만의 재회는, 그렇게 봄날의 벚꽃잎처럼 조용하고 아련하게 시작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