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찾아온 길고양이와의 대화 – 제36화




어느 날 찾아온 길고양이와의 대화 – 제36화

차가운 바람 속, 온기를 찾아서

늦가을의 초입, 계절은 언제나 그랬듯 너무나 빠르게 그 얼굴을 바꾸고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따스한 햇살 아래 노랗게 물들었던 은행잎들이 이제는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차가운 길바닥을 뒹굴었다. 가을비 한 차례가 지나간 뒤, 공기 중에는 뼛속까지 스며드는 듯한 서늘함이 감돌았다. 나는 목도리를 더욱 단단히 여미며 익숙한 골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따라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버린 듯한 쓸쓸함이 나를 감쌌다. 특별히 슬픈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하루하루가 쌓여가는 시간의 무게, 그리고 그 안에서 변치 않는 것과 변해가는 것들 사이에서 길을 잃은 듯한 막연한 공허함이었다. 사람들은 그런 날을 ‘감성’이라고 불렀지만, 내게는 그저 이유 모를 불안감의 다른 이름일 뿐이었다.

골목 어귀, 오래된 담벼락 아래 언제나 그 애가 앉아있던 자리에는 오늘따라 아무것도 없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추운 날씨 탓일까, 아니면 어딘가 아픈 걸까. 수많은 걱정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괜히 초조해져서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익숙한 풍경 속에서 익숙하지 않은 빈자리는 생각보다 훨씬 크게 다가왔다.

침묵 속의 재회

한숨을 내쉬며 그대로 주저앉을까 하던 찰나, 저 멀리서 아파트 단지 상가 건물 코너를 돌아서는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실루엣, 느릿하지만 위엄 있는 걸음걸이. 그 애였다. 나는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동시에, 녀석의 걸음이 평소보다 조금 더 무거워 보이는 것은 내 기분 탓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 애는 마치 내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다는 듯, 내게로 곧장 다가왔다. 그리고는 내 발치에 와서 작게 ‘미야옹’ 하고 울었다. 그 소리는 마치 “오늘도 왔구나, 기다렸지?”라고 말하는 듯했다. 나는 무릎을 굽혀 그 애를 쓰다듬었다. 녀석의 털은 차가운 바람을 견뎌낸 탓인지 살짝 뻣뻣했지만, 그 아래 느껴지는 온기는 여전했다.

“오늘따라 늦었네, 어디 다녀왔어?”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물론 그 애가 대답할 리 없었다. 하지만 녀석은 고개를 들어 내 눈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초록빛 눈동자 속에서 나는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의 층위, 그리고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말하는 듯한 고요한 위로를 읽었다.

불안의 그림자, 그리고 고양이의 눈빛

나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멈추고 말했다.

“요즘 들어 문득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이 모든 게 꿈은 아닐까 하고. 너랑 이렇게 만나는 시간, 너의 따뜻한 온기, 이 모든 게 언젠가 사라져버릴까 봐 무서워.”

내 말에 녀석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여전히 나를 응시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 눈빛은 마치 ‘너는 혼자가 아니야’라고 말하는 듯했다. 나는 그 눈빛에서 묘한 불안감과 동시에 위로를 느꼈다. 어쩌면 그 애도 나와 같은 불안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래서 서로에게 더욱 깊이 의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이었다.

문득, 녀석의 귀 끝이 살짝 찢어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언제 생긴 상처인지, 어떤 싸움에서 얻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 작은 상처는 녀석이 살아온 길고양이로서의 삶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말해주는 듯했다. 차가운 바람과 굶주림, 그리고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위험 속에서도 녀석은 매일 이렇게 나를 찾아와 주었다.

내가 녀석의 귀 끝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자, 녀석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가르릉거렸다. 그 진동은 내 손바닥을 타고 전해져 내 마음속 깊은 곳까지 울렸다. 그 소리는 마치 ‘상처는 괜찮아, 살아있다는 증거일 뿐이야’라고 말하는 듯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너는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갈 수 있는 걸까?”

나는 다시 물었다. 이번에는 녀석에게 듣고 싶은 답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그저 내 안의 응어리를 뱉어내고 싶어서였다.

그 애는 내 물음에 대답하듯, 천천히 일어나 내 옆으로 다가와 몸을 비볐다. 그리고는 익숙한 자세로 내 무릎 위에 자리를 잡았다. 녀석의 따뜻한 체온이 차가웠던 내 다리에 스며들었다. 나는 조용히 녀석의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었다.

녀석의 눈빛은 여전히 고요했지만, 그 속에 담긴 메시지는 명확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저 주어진 오늘을 살아갈 뿐이야. 어제의 고통도, 내일의 불안도 지금 이 순간에는 존재하지 않아.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 너와 내가 함께 있다는 사실뿐.’

나는 문득 깨달았다. 내가 두려워했던 것은 미래의 상실이 아니라, 현재의 불완전함이었다. 완전하지 않은 나 자신, 그리고 언젠가는 끝날지 모르는 이 소중한 인연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그 애는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불완전함 속에서도 아름다움은 존재하며, 현재를 온전히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일이라고.

점점 더 차가워지는 밤공기 속에서 우리는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이 녀석의 털을 스쳐 지나갔지만, 녀석은 꿈쩍도 하지 않고 내 무릎 위에서 작은 숨을 쉬고 있었다. 녀석의 가르릉거리는 소리는 불안했던 내 마음을 조금씩 잠재웠다.

나는 녀석의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그 속에서 느껴지는 온기, 그리고 녀석의 눈빛이 전해주는 무언의 위로. 그것은 어떤 따뜻한 말보다도 강한 힘이 있었다. 상실의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 두려움 속에서도 함께 존재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나는 듯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그렇게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각자의 상처와 불안을 품고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살아내며, 서로의 온기를 찾아 헤매는 작은 존재들. 그리고 그렇게 찾아낸 작은 온기들이 모여, 차가운 세상 속에서도 살아갈 힘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나는 녀석의 털에 얼굴을 묻었다. 녀석에게서 나는 흙냄새와 풀냄새, 그리고 옅은 햇볕 냄새는 나를 깊은 평화 속으로 이끌었다. 제36화의 밤은 그렇게,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따뜻한 위로와 함께 깊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