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 제36화

이수아의 작업실은 회색빛 겨울 햇살조차 스며들지 못하는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캔버스 위에는 반쯤 미완성된 설경이 붓질 한 번 없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붓들은 물감이 굳은 채로 물통에 방치되어 있었다.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그녀의 작업실 풍경은, 얼어붙은 수아의 마음과 다를 바 없었다. 곧 다가올 전시회 날짜는 수아를 옥죄어오는 가시넝쿨 같았지만, 그녀는 그저 멍하니 창밖으로 쏟아지기 시작한 눈발만을 응시할 뿐이었다.

첫눈이 내리던 그 겨울날의 약속. 아득하고 아련한 기억 속에서, 그 약속은 언제나 선명하게 눈꽃처럼 피어났다. 손을 맞잡고 서로의 꿈을 이야기하며, 어떤 시련이 와도 이 눈꽃처럼 아름다운 순간을 잊지 말고 다시 만나자고 맹세했던 날. 그러나 그 후, 강지훈은 홀연히 사라졌고, 수아의 삶에는 약속의 따스함 대신 차가운 절망만이 내려앉았다.

차가운 눈꽃, 따뜻한 기억

차창을 때리는 눈발 소리가 격렬해질 무렵, 작업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고 정우가 들어섰다. 그의 손에는 낡고 작은 나무 상자가 들려 있었다. 정우는 수아의 오랜 친구이자, 지훈과도 가까웠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수아야, 괜찮아? 눈이 이렇게 오는데….”

정우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수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정우는 탁자 위에 상자를 내려놓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거… 네가 찾던 것 같아서 가져왔어. 지훈이 물건 정리하다가 우연히 발견했어. 아마 너에게 주고 싶었던 걸 거야.”

상자 안에는 섬세하게 조각된 나무 눈꽃 장식이 들어 있었다. 그 눈꽃은 마치 살아있는 듯한 디테일을 가지고 있었고, 수아의 손끝에 닿는 순간 잊고 있던 온기가 전해지는 듯했다. 그녀의 눈이 흔들렸다. 그들이 함께 조각했던, 서로에게 영원히 간직하자던 그 눈꽃이었다.

“이건… 분명….”

수아는 손가락으로 눈꽃의 표면을 쓸어내렸다. 눈꽃의 한쪽 면에는 작은 홈이 파여 있었고, 그 홈 안에 숨겨진 종이를 발견했다. 조심스럽게 꺼낸 종이에는 지훈의 필체로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그 언덕, 눈꽃이 피는 곳. 잊지 마.’

그 언덕. 그들이 처음 만나 사랑을 키웠고, 약속을 맹세했던 그곳. 눈꽃이 가장 아름답게 피어나는 그 언덕은, 수아에게는 가장 소중한 추억의 장소이자, 동시에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의 공간이었다. 지난 몇 년간 그 언덕은 그녀에게 금지된 장소나 다름없었다.

“지훈이가… 아직도 이걸 가지고 있었다고?” 수아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다. 정우는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애… 너와의 약속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어. 그 언덕에도 가끔 갔었대.”

정우의 말은 수아의 얼어붙은 마음에 미약하지만 분명한 균열을 일으켰다. 지훈이 사라진 후, 모든 이들은 그가 죽었다거나, 혹은 그녀를 버리고 떠났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조각과 메시지는, 여전히 그가 살아있고, 약속을 기억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어둠 속으로의 발걸음

밖은 이미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도시는 하얀 장막에 갇힌 듯 모든 소리를 잃어가고 있었다. 정우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수아를 바라봤다.

“이런 날씨에 어딜 가려고? 눈이 너무 많이 와. 길도 다 얼었을 거야.”

수아는 외투를 걸쳐 입으며 대답했다.

“가봐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게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

그녀의 눈빛은 흔들림 없었다. 지난 세월 동안 그녀를 짓눌렀던 절망감 속에서, 이 작은 눈꽃과 메시지는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되어 그녀를 이끌었다. 그것은 마치 잃어버린 자신의 조각을 찾는 듯한 간절함이었다.

차의 시동을 걸고, 수아는 눈발을 헤치며 언덕을 향해 나아갔다. 길은 이미 눈으로 뒤덮여 있었고, 시야는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와이퍼가 맹렬하게 눈을 걷어냈지만, 곧 다시 쌓이는 눈 때문에 도로는 마치 미지의 세계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지훈과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햇살이 쏟아지던 푸른 언덕에서 함께 그림을 그리던 날, 차가운 손을 잡고 서로의 온기를 나누던 겨울 밤, 그리고 하얀 눈꽃이 흩날리던 그날의 맹세. 모든 기억이 칼날처럼 그녀의 심장을 꿰뚫는 듯했다. 왜 떠났어, 지훈아? 왜 아무 말도 없이….

차가 언덕 초입에 멈춰 섰다. 더 이상 운전은 불가능했다. 수아는 차에서 내려 눈 속에 발을 내디뎠다. 허리까지 차오르는 눈밭을 헤치며, 그녀는 한 발 한 발 언덕 위로 걸어 올라갔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차가운 눈이 그녀의 신발 속으로 스며들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직 지훈의 메시지에 이끌려, 그녀는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눈꽃이 피는 곳

숨이 턱까지 차오를 무렵, 익숙한 실루엣이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 어릴 적 함께 숨바꼭질을 하며 놀던 낡은 천문대. 그리고 그 옆에 홀로 우뚝 서 있는, 수아와 지훈이 가장 좋아했던 오래된 소나무. 소나무 가지마다 눈꽃이 탐스럽게 피어 마치 순백의 조각품 같았다.

“눈꽃이 피는 곳….”

수아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소나무 아래로 다가갔다. 소나무 아래는 작은 눈 더미가 쌓여 있었고, 그 위에 마치 누군가 일부러 올려둔 듯한 나무 상자가 놓여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한 권의 낡은 일기장과, 수아가 지훈에게 선물했던 작은 손목시계가 들어 있었다.

일기장의 첫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지훈의 필체가 다시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가장 최근 일기였다. 날짜는 그가 사라진 지 한참 지난, 몇 달 전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수아야. 내가 이곳에 다시 왔어. 이곳에 올 때마다 네가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아. 내가 왜 떠났는지, 왜 너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는지 너는 결코 이해하지 못할 거야. 나의 병이, 나의 모든 것이 너에게 짐이 될까 봐 두려웠어. 너는 그 무엇보다 소중하니까. 너의 꿈은 활짝 피어나야 하니까. 나는 그저 너의 그림자 속에서 너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어. 하지만… 그 언덕, 눈꽃이 피는 곳에서 너와 다시 만나자는 약속은, 단 한 순간도 잊은 적 없어. 내 마지막까지, 나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할 거야. 내가 없더라도, 너는 반드시 행복해야 해.’

일기장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뭉개진 글씨로 겨우 적은 문장이 있었다.

‘그 약속… 지킬게. 언제나… 너와 함께…’

수아는 일기장을 가슴에 품고 무릎을 꿇었다. 차가운 눈밭에 그녀의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지훈의 사랑, 그의 희생, 그가 견뎌야 했을 고통. 그 모든 것이 그녀의 심장을 산산조각 내는 듯했다. 그는 그녀를 버린 것이 아니었다. 그녀를 너무나 사랑했기에, 자신의 병이 그녀의 앞길을 막을까 봐 홀로 고통을 감내했던 것이었다.

눈물과 콧물로 얼룩진 얼굴로, 수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토록 차가운 눈보라 속에서도, 그 언덕은 여전히 아름다운 눈꽃으로 가득했다. 마치 지훈의 변치 않는 사랑을 상징하는 듯, 하얗고 깨끗한 눈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춤을 추고 있었다.

일기장과 함께 상자 속에 있던 손목시계를 꺼내 들었다. 시계는 멈춰 있었다. 지훈이 사라진 바로 그 시간, 그 약속의 순간에 멈춰 있었다. 수아는 멈춰버린 시계를 자신의 손목에 채웠다. 이제 멈춰버린 시간을 움직여야 할 때였다. 지훈이 남긴 이 마음을, 그리고 그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그녀는 다시 일어서야 했다.

갑자기 강렬한 바람과 함께 눈보라가 더욱 거세게 몰아쳤다. 눈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휘몰아치는 눈발 속에서, 수아는 언뜻 소나무 뒤편으로 사라지는 흐릿한 그림자를 본 듯했다. 마치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가, 그녀가 일기장을 발견하자 홀연히 사라지는 지훈의 환영인 듯했다. 그녀는 그 그림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지훈아…!”

그러나 그림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차가운 눈만이 그녀의 손을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수아는 주저앉아 오열했다. 모든 것이 너무나 분명해진 순간, 그녀는 비로소 그를 향한 원망을 놓아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되었다. 멈춰버린 시계를 다시 움직이게 할 용기, 그리고 지훈이 지켜보고 있을 그곳에서 다시 한번 새로운 시작을 할 용기. 그 눈꽃처럼 순수한 약속을, 그녀는 이제 홀로, 그러나 함께 지켜나가야만 했다.

눈보라는 여전히 맹렬했지만, 수아의 가슴속에는 차가운 절망 대신 뜨거운 희망과 알 수 없는 결의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일기장을 품에 안고, 멈춰버린 시계를 꽉 쥔 채, 눈꽃이 흩날리는 언덕 위에서, 새로운 약속을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