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으로는 올겨울 들어 가장 많은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하얀 눈송이들이 쉴 새 없이 허공을 가르며 지상으로 내려앉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지우는 따뜻한 온기가 감도는 작업실 안에서 창밖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는 눈꽃들을 보고 있자니, 마치 아주 오래전 그날처럼 모든 소음이 흡수되어 세상이 고요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날도 이처럼 눈이 펑펑 내렸더랬다. 그리고 그날, 깨어져 버린 조각들과 함께 약속 하나가 새겨졌지.
마음속 깊이 묻어두었던 기억의 서랍이 저절로 열렸다. 꽁꽁 얼어붙었던 심장이 아릿하게 녹아내리는 통증을 느꼈다. 지우는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며 찻잔을 들었다. 따뜻한 차 한 모금이 얼어붙은 몸을 데우는 동안, 지난 세월 동안 그녀를 짓눌러왔던 무게가 다시금 어깨를 짓눌렀다. ‘괜찮을 거야, 괜찮아.’ 수없이 되뇌었던 주문이 무색하게,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울리는 불안의 종소리는 멈출 줄 몰랐다.
잊혀진 약속의 그림자
똑똑. 예기치 않은 노크 소리에 지우는 화들짝 놀라 현실로 돌아왔다.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망설이다 문을 열자, 차가운 눈발을 맞으며 서 있는 익숙한 얼굴에 지우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서준이었다. 몇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의 눈빛은 여전히 그날의 겨울 숲처럼 깊고 투명했다. 다만, 그 안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예전과는 다르게 짙어진 것을 지우는 단번에 알아챘다.
“지우야.”
오랜만에 듣는 그의 목소리는 낮고 나른했다. 마치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짐승의 울음소리 같기도, 혹은 잃어버린 것을 찾아 헤매는 방랑자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지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눈에 젖어 살짝 헝클어진 그의 머리카락과 붉어진 뺨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코끝에도, 어깨 위에도 하얀 눈꽃들이 내려앉아 있었다. 마치 그날처럼.
“들어와, 서준아. 눈 많이 맞았잖아.” 지우는 겨우 입을 열었다. 제 목소리가 낯설게 떨린다는 것을 스스로도 느꼈다. 서준은 말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발자국이 남긴 눈 녹은 물방울이 작업실 바닥에 작은 흔적을 만들었다.
“오랜만이네.” 그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시선은 테이블 위 붓과 물감에 닿았다. “여전히 그림을 그리는구나.”
“응. 난 늘 그랬지.” 지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변치 않는 것은 오직 이것뿐이라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시선은 서준의 왼손으로 향했다. 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보며 숨이 턱 막혔다. 단순한 은반지였지만, 지우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약속의 증표. 하지만 누구와의 약속이었을까. 그녀와의 약속은 아니었을 터였다.
차가운 진실의 무게
차 한 잔을 내어주자, 서준은 지우가 늘 앉던 창가 자리에 앉았다. 창밖의 설경은 여전히 눈부셨다. 그들의 사이를 메우는 침묵은 너무도 길고 무거웠다. 그 침묵 속에서 지우는 수많은 질문과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왜 이제야 나타난 걸까. 그동안 어디에 있었을까. 그리고 그 약속은, 그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오늘… 첫눈이 왔어.” 서준이 먼저 침묵을 깼다. 그의 시선은 창밖을 향했지만, 어딘가 허공을 응시하는 듯했다. “그래서 왔어.”
지우는 심장이 다시 한번 크게 울리는 것을 느꼈다. 첫눈. 그날의 약속을 떠올리게 하는 유일한 트리거. 그가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안도감과 동시에 더 큰 불안이 밀려들었다. 그가 기억하는 약속이 과연 자신이 기억하는 그것과 같을까.
“어떤 약속?” 지우는 자신도 모르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목소리가 얇게 떨렸다.
서준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지우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깊었다. “우리가 함께… 이루기로 했던 꿈.”
그 순간, 지우의 마음속에서는 무언가 억눌려왔던 감정이 폭발하는 것 같았다. 꿈. 그가 그저 꿈을 이야기하는 동안, 지우는 그 꿈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다. 그가 떠난 후에도, 지우는 그들의 약속을 붙들고 홀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뎌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아무렇지 않게 ‘꿈’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마치 그것이 단순한 바람이었을 뿐, 그녀에게 던져진 무거운 짐이 아니었다는 듯이.
“그게 다야?” 지우의 목소리는 분노로 차올랐다. “그 꿈 때문에 내가 뭘 잃었는지 알아? 당신은 그저 떠났지만, 나는 여기에 남아서, 우리가 함께 만들기로 했던 세상이 부서지는 걸 매일 봐야 했어.”
서준의 표정은 미동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 속에 슬픔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 지우는 놓치지 않았다. “내가 떠난 건… 너를 지키기 위해서였어.”
“지켜?” 지우는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날 지킨다고? 혼자 남겨진 내가 얼마나 비참했는지 알아? 당신은 약속을 지킨다고 말하면서, 나를 버렸어. 그날의 눈꽃처럼 하얗게 부서져 버린 내 마음은, 어떻게 할 건데?”
엇갈린 기억의 파편
지우의 말에 서준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천천히 지우에게 다가왔다. 그의 그림자가 지우를 덮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의 향기가 지우의 코끝을 스쳤다.
“지우야, 나는… 그날의 약속을 잊은 적 없어.” 서준의 목소리는 이제 애원하듯이 낮아졌다. “너와 나, 그리고 우리의 꿈. 그 모든 것이 나에게는 너무나 소중했어. 그래서 어쩔 수 없었어. 내가 여기에 남는다면, 너마저도 위험해질 상황이었으니까.”
“무슨 소리야?” 지우는 서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위험? 그녀는 그저 그가 약속을 저버리고 떠났다고만 생각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변명들은 너무나 생경했다. “난 아무것도 몰라. 당신이 떠난 그날 이후로, 내 세상은 얼어붙었어. 그 어떤 따뜻함도 내게는 허락되지 않았어. 당신이 지켰다는 건 도대체 무엇인데?”
서준은 손을 뻗어 지우의 뺨을 감쌌다. 차가운 그의 손길에 지우는 순간 몸을 움츠렸다. 그의 눈빛은 혼란스러움과 동시에 깊은 회한을 담고 있었다. “나는 네가 그 약속을… 너 혼자서 감당하게 될 줄은 몰랐어. 네가 그렇게 오랫동안 고통받을 줄도 몰랐어.”
그의 손가락에 끼워진 은반지가 지우의 뺨에 닿았다. 그 차가운 감촉에 지우는 문득 어떤 기억의 파편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날, 눈꽃이 내리던 날, 서준이 자신에게 끼워주었던 반지. 그리고 그가 맹세했던 말들. 하지만 그 기억은 너무나 희미해서 잡으려 할수록 더욱 멀어졌다.
“그 반지는…?” 지우는 간신히 질문했다. “왜 아직도 그걸 끼고 있어?”
서준은 지우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며 말했다. “이건… 너와의 약속을 잊지 않기 위한 내 증표였어. 내가 돌아올 수 있는 날이 오면, 반드시 너에게 이것을 다시 줄 거라고.”
지우는 혼란스러웠다. 그가 떠나던 날, 분명 자신에게 이 반지를 남기고 떠났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가 여전히 그것을 끼고 있다니? 그녀의 손가락에도 똑같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것은 닳고 닳아 빛을 잃은 지 오래였다. 두 개의 똑같은 반지, 하지만 엇갈린 기억. 무엇이 진실이었을까.
창밖에서는 여전히 눈꽃들이 흩날렸다. 그 하얀 눈송이들처럼, 그들의 기억도 서로 다른 형태로 부유하고 있었다. 서준은 지우의 뺨을 감싼 손을 풀고,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천천히 빼냈다. 그리고는 그것을 지우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제… 너에게 돌려줄 때가 된 것 같아.”
차가운 은반지가 손바닥에 닿는 순간, 지우는 그날의 차가운 눈꽃처럼 얼어붙은 감각을 느꼈다. 눈앞의 서준은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미스터리였다. 그가 말하는 ‘지킴’과 그녀가 겪었던 ‘버려짐’ 사이의 간극은 너무나 깊었다. 그들 사이의 약속은 과연 같은 의미였을까? 아니면, 그 약속은 처음부터 서로 다른 조각들로 이루어진 것이었을까.
지우는 손 안의 반지를 꽉 쥐었다. 차갑게 식은 은에서 알 수 없는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그러나 그 온기는 따뜻함이 아닌, 미지근한 혼란에 가까웠다. 서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를 응시할 뿐이었다. 그 깊은 눈 속에서, 지우는 어떤 진실의 조각이 아직 숨겨져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 진실은, 아마도 또 다른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처럼, 차갑고도 아픈 비밀을 담고 있을 터였다.
창밖의 눈은 그칠 줄 몰랐다. 그 하얀 장막 너머로, 이 모든 오해와 고통의 시작이었던, 그러나 또한 유일한 희망이었던 그날의 약속이 뿌옇게 아른거렸다. 지우는 서준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을 작정이었다. 어떤 진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든, 그녀는 그 모든 것을 직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음 눈꽃이 내리는 날에는, 이 모든 의문이 풀릴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