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낡은 일기장 – 제25화

밤이 깊도록 잠 못 이루는 날들이 이어졌다. 지혜는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을 품에 안고 창밖을 내다봤다. 도시의 불빛은 여전히 휘황찬란했지만, 그 빛 속에서도 지혜의 마음은 깊은 동굴에 갇힌 듯 먹먹했다. 지난 며칠간 일기장을 통해 마주한 할머니의 젊은 날은, 지혜가 알던 단단하고 강인한 할머니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른, 연약하고 아련한 한 여인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이제, 피할 수 없는 진실의 문턱에 다다라 있었다.

차분히 숨을 고른 지혜는 조심스럽게 일기장의 페이지를 넘겼다. 익숙한 듯 낯선 할머니의 글씨체는 이제 지혜에게 또 다른 할머니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손때 묻은 페이지의 한 귀퉁이에 찍힌 날짜는 1957년, 늦겨울의 끝자락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날짜 아래로 쓰인 글들은 유독 힘이 없고 떨리는 듯했다. 지혜는 홀린 듯 글자들을 따라 읽어 내려갔다.

1957년 겨울, 끝자락에서.


나는 오늘, 내 모든 것을 걸고 지켜온 꿈을 꺾었다. 오직 가족을 위해. 어린 동생들의 눈빛, 병든 어머니의 마른 기침 소리가 내 발목을 잡았다. 내 힘으로 이 집안을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나를 버리는 것이었다.

준호 씨에게 작별을 고했다. 아니, 고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따뜻한 손을 뿌리치고 돌아서는 그 순간, 내 심장은 찢어지는 듯했다. 그는 내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눈물 어린 얼굴로 서 있었다. 그의 눈빛은 잊을 수 없는 그림처럼 내 가슴에 새겨졌다.

‘순옥 씨,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아 밤잠을 설치게 한다. 나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내게 작은 나무 새를 건네며 말했다. ‘이 새처럼, 언젠가 우리도 자유롭게 날 수 있을 거예요. 그때까지 부디 몸 건강히…’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감히 그 작은 새를 받아들 용기조차 없었다. 그 새를 받으면, 그의 꿈을 함께 짊어지는 것만 같아서.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새장 속의 새가 되기로 했다. 영호 씨와의 혼례가 정해졌다. 나는 이제 김영호 씨의 아내가 될 것이다. 내 가슴속 준호 씨의 자리는 영원히 숨겨진 정원이 되리라. 아무도 모르게, 나 혼자서만 가꿀 정원.

사랑하는 준호 씨, 부디 나를 잊고 자유롭게 날아오르세요. 당신의 몫까지, 행복하게 살기를…

지혜의 손에서 일기장이 미끄러져 떨어졌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심장도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듯했다. 눈물이 뜨겁게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할머니의 담담한 글 속에서 지혜는 젊은 순옥의 울부짖음을, 억누른 절규를 생생하게 느꼈다. 지혜가 알던 할머니는 평생 한 번도 약한 모습을 보인 적 없는 강철 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일기장 속 순옥은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했던, 사랑하는 이의 손을 놓아야만 했던 가여운 소녀였다.

할머니가 이 모든 아픔을 홀로 감내하며 살아왔다는 사실이 지혜의 가슴을 찢어놓았다. ‘숨겨진 정원.’ 그 문구가 지혜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할머니의 평생을 관통하는 고독한 사랑과 희생의 흔적. 지혜는 문득 할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렸다. 언제나 과묵하고 다정하기보다는 엄격했던 할아버지, 김영호 씨. 할아버지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을까? 할머니의 가슴속에 숨겨진 정원이 있다는 것을?

지혜는 할머니의 집안 곳곳에 스며든 묘한 분위기를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할머니가 가끔씩 창밖 먼 곳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눈빛, 어떤 노래를 흥얼거릴 때 스치던 아련한 미소, 그리고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바라보던 그 알 수 없는 시선까지. 모든 것이 이 일기장 속 이야기에 의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고 있었다.

‘작은 나무 새.’ 할머니는 준호 씨에게서 그 새를 받지 못했다고 했다. 하지만 왜인지 지혜의 머릿속에는 어렴풋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어릴 적, 할머니의 자개장 깊숙한 서랍에서 발견했던 작은 나무 조각. 그것은 새의 형상이었지만, 너무나 작고 낡아서 제대로 된 모양을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그저 장난감인 줄로만 알았던 그것을 할머니는 늘 어떤 보물처럼 품고 있었다. 할머니는 그것을 볼 때마다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기곤 했다.

지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할머니가 죽는 순간까지도 놓지 않았던 그 나무 조각이, 어쩌면 준호 씨가 남긴 작은 나무 새일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강하게 스쳤다. 할머니는 일기장에는 받지 못했다고 적었지만, 어쩌면 나중에라도 몰래 간직했을 수도 있다. 혹은 지혜가 본 것은 다른 새 조각이었을까?

지혜는 불현듯 할머니의 유품이 담긴 상자들을 떠올렸다. 오래된 자개장은 이미 고물상으로 넘어갔지만, 할머니의 손때 묻은 작은 물건들은 아직 지혜의 방 한켠에 고이 모셔져 있었다. 그 속에 그 나무 새가 있을지도 모른다. 지혜는 상자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할머니의 숨겨진 정원의 마지막 씨앗을 찾아내려는 듯, 그녀의 눈빛은 비장함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제 그 새는 단순한 나무 조각이 아니었다. 할머니의 평생의 그리움과 사랑이 응축된, 작지만 가장 무거운 유품이었다. 지혜는 할머니가 다 이루지 못한 꿈의 조각들을 주워 담아 이어 붙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음 장에는 또 어떤 진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 지혜는 알 수 없었지만, 더 이상 뒤돌아설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