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찾아온 길고양이와의 대화 – 제44화

늦가을의 해는 유난히 짧았다. 노을이 채 지기도 전에 먹구름이 서서히 하늘을 덮었고,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금세 어스름한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쌀쌀한 바람이 마지막 남은 낙엽들을 거칠게 흔들었고, 앙상한 가지들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마치 쓸쓸한 속삭임처럼 들려왔다. 나는 무릎을 끌어안고 창가에 앉아,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따뜻한 온기를 갈구했다. 오늘따라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그때였다. 창문 아래 익숙한 그림자가 스쳤다. 얼룩무늬 털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내 작은 별이었다. 여느 때처럼 조용히 나타나 풀숲에 몸을 숨기던 녀석은 오늘은 왠지 주저하는 듯했다. 평소 같으면 벌써 창가로 뛰어 올라와 눈을 마주했을 텐데, 오늘은 희뿌연 유리창 너머로 나를 그저 올려다볼 뿐이었다.

나는 얼른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섰다. 찬 기운이 온몸을 감쌌지만, 별이를 향한 반가움이 더 컸다. “별아, 어서 와.” 목소리에 저절로 다정함이 묻어났다. 녀석은 내 목소리를 듣자 그제야 천천히 다가왔다. 발소리마저 조심스러운 그 걸음걸이가 오늘따라 더욱 애틋하게 느껴졌다.

따뜻하게 데운 사료를 그릇에 담아 내밀자, 별이는 코끝을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배고플 텐데도 허겁지겁 먹지 않고, 한참을 내 얼굴을 올려다보는 녀석의 노란 눈동자에 오늘의 내 마음처럼 먹먹한 무언가가 담겨 있는 듯했다. “왜 그래? 맛 없어?” 내가 살며시 묻자, 별이는 작게 ‘야옹’ 하고 울더니 이내 고개를 파묻고 사료를 먹기 시작했다.

녀석이 밥을 먹는 동안, 나는 조심스럽게 등을 쓰다듬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털의 감촉이 마음에 작은 위안을 주었다. “오늘따라 쓸쓸해 보이네, 별이 너도. 추워져서 그런가?” 내 말에 별이는 잠시 먹는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은 늘 그래왔듯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깊었다.

몇 년 전, 처음 별이를 만났던 겨울이 떠올랐다. 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 온몸을 웅크린 채 작은 발자국을 남기며 내게 다가왔던 그 모습. 그때의 별이는 지금보다 훨씬 작고 여려 보였지만, 눈빛만은 강인했다. 그 작은 몸으로 혹독한 추위와 배고픔을 견뎌내며 살아남았을 녀석을 생각하면, 지금 내 앞에 앉아 따뜻한 밥을 먹고 있는 모습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별아, 기억나? 처음 우리 만났을 때. 그때 정말 추웠지.” 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별이는 ‘야옹’ 하고 짧게 대답하며 내 손에 얼굴을 비볐다. 마치 그때를 함께 기억하고 있다는 듯이. “그때는 네가 겨울을 견딜 수 있을까 걱정이 많았어. 그런데 이렇게 씩씩하게 잘 지내주고 있어서 고마워.”

별이는 밥을 다 먹고 깨끗하게 혀로 입가를 핥은 뒤, 내 무릎 위로 폴짝 뛰어 올랐다. 그리고는 익숙하게 내 허벅지를 꾹꾹 누르며 자세를 잡았다. 고롱거리는 소리가 쌀쌀한 공기를 녹이듯 따뜻하게 울려 퍼졌다. 나는 별이의 부드러운 털 속에 얼굴을 묻었다. 녀석에게서 풍겨오는 흙냄새와 풀냄새, 그리고 옅은 햇살 냄새가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요즘 들어 부쩍 시간이 빨리 가는 것 같아. 여름이 엊그제 같았는데 벌써 겨울 준비를 해야 할 때라니.” 나는 별이의 등을 쓰다듬으며 마음속 깊이 숨겨두었던 불안감을 털어놓았다. “가끔은 이 모든 것이 너무 빨리 변해버려서 무섭기도 해. 모든 소중한 순간들이 눈 깜짝할 새에 사라져 버릴까 봐.”

별이는 가만히 내 말을 듣고 있었다. 한동안 고롱거림만 이어지더니, 이내 녀석은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투명한 노란 눈동자 속에는 어떠한 조바심도, 불안도 없었다. 오직 고요하고 깊은 현재만이 존재했다. 녀석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마치 바쁘게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고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별이는 눈빛으로 말하는 듯했다. ‘순간은 사라지지 않아. 모든 순간은 여기, 그리고 여기에 남아.’

나는 별이의 눈빛에서 강한 위로를 받았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잡으려 애쓰고, 너무 많은 것을 걱정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별이는 달랐다. 녀석은 그저 주어진 순간을 온전히 살아냈다. 따스한 햇살 아래 낮잠을 자고, 갓 잡은 사냥감을 자랑스럽게 물고 오고, 비 오는 날 처마 밑에서 빗소리를 듣는 것. 녀석에게는 그 모든 순간이 충만한 삶이었다.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별아.” 나는 웃으며 별이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멀리 보려다가 지금 이 순간의 아름다움을 놓치고 있는지도 모르겠네. 너처럼,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해야 하는데.”

별이는 내 말을 알아들은 듯 눈을 가늘게 뜨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몸을 둥글게 말고는 내 무릎 위에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고롱거리는 소리는 여전히 잔잔하게 이어졌다. 나는 별이의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둠은 더욱 깊어졌고, 마지막 낙엽마저 바람에 실려 사라졌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는 더 이상 허전함이 없었다. 대신, 별이의 고롱거리는 소리처럼 따뜻하고 잔잔한 평화가 가득 채워졌다. 길고양이와의 대화는 늘 나에게 삶의 중요한 깨달음을 주었다. 시간은 흐르고 계절은 변하지만, 함께 나누는 소중한 순간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마음속에 영원히 새겨진다는 것을. 별이와 나는, 오늘도 변함없이 그 진리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다가오는 겨울도, 또 어떤 시련이 찾아올지라도, 우리는 함께 견뎌낼 것이다. 지금 이 순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