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 제29화

차가운 바람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서연은 얇은 담요를 더욱 바싹 여몄다. 겨울밤은 길고, 그 길고 고독한 밤은 언제나 지훈을 향한 그리움을 한 뼘 더 키워놓았다. 탁자 위에는 마시다 식어버린 차 한 잔과, 며칠 밤을 새워 완성한 그림이 놓여 있었다. 캔버스 속에는 눈꽃이 흩날리는 오래된 돌담길이 펼쳐져 있었다. 그 길 끝에는 늘 그와 그녀가 있었다.

“지훈아…”

나지막이 읊조린 그의 이름은 입술 끝에서 허공으로 흩어졌다. 지난 몇 달간의 시간은 마치 안개 속을 헤매는 듯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떠남, 그리고 뒤이어 들려온 이해할 수 없는 소문들. 그의 부재는 서연의 삶에 깊은 상흔을 남겼지만, 그녀의 마음속에 그를 향한 믿음의 불씨는 결코 꺼지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떠난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자신에게 말할 수 없는 어떤 사정이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다그치며 버텨왔던 날들이었다.

그때, 현관문에서 희미한 인기척이 들렸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은… 서연은 망설임 끝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자, 차가운 겨울 공기와 함께 익숙하지만 동시에 낯선 향기가 밀려들어왔다. 지훈이었다. 눈발이 듬성듬성 앉은 코트와 얼어붙은 머리카락, 그리고 깊이를 알 수 없는 그의 눈동자. 그는 마치 오랜 유랑 끝에 겨우 돌아온 사람처럼 지쳐 보였다.

“서연아…”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지난 시간 동안 그를 괴롭혔을 고뇌의 흔적이 역력했다. 서연은 그의 이름을 부르려 했으나, 목구멍에서 단어들이 엉겨 붙어 나오지 않았다. 수많은 질문들이 그녀의 혀끝에서 맴돌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저 그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지훈은 망설이는 듯 한 발짝 다가섰고, 서연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벽이 세워진 듯했다.

“할 이야기가 있어.”

지훈이 말했다. 그의 시선은 바닥을 향했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돌아왔다는 것만으로도, 이 모든 것을 견딜 힘이 생기는 것 같았다.

엇갈린 진실의 조각들

지훈은 조심스럽게 거실로 들어섰다. 난롯불이 타닥이는 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렸다. 그는 따뜻한 차 한 잔을 받아 들었지만,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대신, 그의 시선은 서연이 그린 그림에 멈췄다. 눈송이가 흩날리는 돌담길, 그리고 그 길을 함께 걷던 어린 시절의 자신들과 서연. 그림은 그들의 가장 순수했던 약속의 순간을 담고 있었다.

“기억나? 저 날…” 지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눈꽃이 손에 닿으면 녹아버려서, 영원히 간직할 수 없을 거라고 울었잖아, 네가.”

서연은 그때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라 미소 지었다. “네가 그랬지. 사라지는 것들은 마음속에 더 오래 남는다고. 그래서 약속했잖아. 눈꽃처럼 사라지지 않을 약속을 하자고.”

그들의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 눈빛 속에는 지난 세월의 그리움과 오해, 그리고 여전히 변치 않는 애정이 뒤섞여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랑을 가로막는 무언가가 분명히 존재했다.

“내가 왜 떠났는지… 모든 걸 말해야 할 것 같아.” 지훈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어머니의 병, 그리고 가문의 부채. 그 모든 것을 해결하기 위해선… 그들의 요구를 따를 수밖에 없었어.”

서연의 심장이 다시 한번 크게 울렸다. 지훈의 가족이 어려움에 처했다는 소식은 익히 들었지만, 그가 그 모든 것을 홀로 감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그리고 ‘그들’이라는 단어에 서연은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녀는 이미 소문을 통해 지훈이 재벌가 영애와의 약혼을 강요받았다는 이야기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사람과 약혼을 한 거야?” 서연의 목소리는 떨렸다. “나를 버리고, 그 사람을 선택한 거야?”

지훈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서연아. 결코 널 버린 게 아니야. 난 그저…”

그때, 지훈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화면에는 ‘강민준’이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떠 있었다. 서연은 그 이름을 보자마자 온몸의 피가 식는 것을 느꼈다. 강민준. 그녀가 힘들 때마다 곁을 지켜주었던 오랜 친구이자, 지훈이 떠난 후부터 그녀의 그림자처럼 맴돌았던 남자. 그리고 그가 지훈과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어렴풋한 소문 또한 있었다.

지훈은 휴대폰을 황급히 뒤집어 놓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서연의 눈빛은 이미 깊은 상처로 물들어 있었다.

“민준이… 왜 너한테 전화를 해? 너희 둘이 대체 무슨 관계인 거야?”

숨겨진 진실의 그림자

지훈은 입을 다물었다. 민준과의 관계는 그가 서연에게 숨기고 싶었던 가장 큰 비밀 중 하나였다. 민준은 지훈의 가족이 처한 위기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었지만, 그 대가로 지훈에게 어떤 조건들을 제시했었다. 그리고 그 조건 중 하나는 서연의 주변을 맴도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서연의 안전을 지켜주면서도 동시에 지훈과 서연 사이의 간극을 벌리는 것이었다.

“말해 봐, 지훈아! 나한테 숨기는 게 뭔데? 설마… 민준이가 네가 나를 떠난 이유와 관련이 있는 거야?”

서연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 지훈은 그녀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지난 세월 동안 그가 쌓아 올린 모든 거짓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그는 침묵으로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었다.

“내가 떠났을 때, 민준이가 나를 찾아왔었어. 내가 사라진 이유가 너 때문이라고, 네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고… 그래서 너를 지키는 방법은 내가 너에게서 멀어지는 것이라고.”

지훈은 비틀거렸다. 진실의 무게는 너무나 거대했다. “민준이는… 나에게 방법을 제시했어. 가문을 살리고, 너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그게… 잠시 동안 너의 곁을 떠나는 것이었어.”

서연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민준이가 왜… 우리 관계에 개입을 해?”

그 순간, 현관문이 다시 한번 열렸다. 이번에는 노크도 없이, 차가운 바람을 몰고 강민준이 서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는 지훈과 서연을 번갈아 보며,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여유롭게 말했다.

“결국 다 말했군, 이지훈. 하지만 아직 모든 걸 말한 건 아니지 않나?”

민준의 등장에 지훈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는 서연을 보호하려는 듯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민준아, 이건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

“상관이 없다고? 이지훈, 내가 너의 가족을 위기에서 구해준 대가가 고작 이것뿐이라고 생각하나? 그리고 서연이에게 아직 말하지 않은 가장 중요한 사실이 있지 않나?”

민준의 시선이 서연에게 닿았다. 그의 눈빛은 지훈의 것과는 다른, 소유욕과 탐욕이 뒤섞인 불길한 빛을 띠고 있었다.

“서연아, 지훈이가 너에게 숨기고 있는 또 다른 진실이 있어. 지훈이가 너를 떠난 건, 단지 너의 안전을 위해서만은 아니었어. 아니, 정확히는… 너의 안전을 빌미로 그가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한 거지. 너와 나 사이의 그 ‘약속’ 말이야.”

민준의 말에 서연은 혼란에 빠졌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워지는 듯했다. 대체 무슨 진실이 더 남아 있다는 말인가.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그 약속은 두 사람만의 것이었다. 그 약속이 왜 민준의 입에서 오르내리는가. 그리고 지훈은, 왜 그리도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침묵하는가.

바깥에서는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창밖을 통해 들어오는 차가운 눈발은 마치 그들의 위태로운 관계를 대변하는 듯했다. 서연의 마음속에 쌓여왔던 지훈을 향한 믿음은, 이 모든 혼란 속에서 점차 차갑게 굳어지고 있었다. 과연 그들의 약속은 이 겨울, 눈꽃처럼 스러져 버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