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깊어지고, 지우의 방에는 낡은 일기장의 종이 냄새와 그녀의 흐느낌만이 가득했다. 탁상 스탠드의 노란 불빛 아래, 할머니 수연의 꾹꾹 눌러 쓴 글씨들이 지우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이전 장에서 읽었던 짤막하고 의미심장한 문장, “그 아이를 보내야만 했다. 그게 최선이었다.”는 문장이 밤새 지우의 머릿속을 맴돌았었다. 이제야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두려움과 간절함이 뒤섞였다.
페이지는 얇아지고 닳아 있었지만, 잉크는 굳건히 세월을 버텨내고 있었다. 지우는 떨리는 손으로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주한 글은, 단순한 회고록이 아닌, 한 여인의 생을 송두리째 뒤흔든 고통스러운 절규였다.
수연의 일기 (1953년, 겨울)
나의 작은 별을 보내던 밤
하늘은 검었고, 별조차 얼어붙은 듯 빛을 잃었다. 바람은 살을 에는 듯 매서웠고, 내 품에 안긴 작은 아이의 숨결마저 금방이라도 얼어붙을 것 같았다. 부산역 플랫폼, 피난민들의 웅성거림 속에서 나는 세상이 멈춘 것 같은 침묵을 느꼈어. 갓 두 돌을 넘긴 내 아들, 현우. 그 작은 손을 잡고 나는 수없이 망설였다. 이 아이를, 내 목숨보다 귀한 이 아이를, 정말 내가 보낼 수 있을까?
굶주림과 추위, 그리고 언제 다시 폭탄이 떨어질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나는 매일 밤 잠 못 이루며 고민했어. 나 혼자서는 이 아이를 지킬 수 없다는 절망감. 겨우 하루 한 끼를 연명하며 나까지 쓰러지면 이 아이는 누가 돌볼까. 병약한 몸으로 전쟁 통에 떠도는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어. 그저 이 아이의 눈에 고인 배고픔과 서러움을 매일 보는 것이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기분이었지.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알게 된 분이 있었어. 미군 부대에서 일하다 아이를 잃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라는 아주머니. 그녀는 현우를 보고 말했다. “내가 저 아이를 데려가서 친딸처럼 키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꼬.” 처음엔 그저 동정심이겠거니 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에서 나는 진심을 보았다. 아이를 향한 애정, 그리고 아이 없는 삶의 공허함. 그녀는 현우에게 따뜻한 집과 굶지 않는 끼니를 약속했다. 나에게는 해줄 수 없는 것들이었지.
며칠 밤낮을 울고 또 울었다. 내 아이를 남의 손에 맡긴다는 것은 나에게는 죽음과도 같았다. 하지만 현우가 배고픔에 울고 추위에 떠는 모습을 보며, 나의 욕심이 이 아이를 더 불행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에 미쳤어. 아이는 살아야 했다. 무엇보다 따뜻하고 안전한 곳에서. 나 없이도, 이 아픈 어미 없이도, 그 아이는 살아야만 했다.
결국, 그 날이었다. 부산역. 나는 낡은 솜저고리를 입은 현우를 꽉 끌어안았다. 작은 심장이 내 품 안에서 콩닥거렸다. 차가운 겨울바람에 현우의 작은 코끝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아주머니가 탄 열차가 저 멀리서 연기를 뿜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현우의 볼에 마지막 입맞춤을 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아기의 살결. 이 온기를 다시 느낄 수 있을까.
“현우야, 엄마는 괜찮아. 엄마는 여기서 기다릴게. 가서 아주머니 말씀 잘 듣고, 밥 잘 먹고, 건강하게 지내야 해.” 내 목소리는 파르르 떨렸고, 현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올려다봤다. 엄마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무엇인지 모르는 순진한 눈이었다. “엄마는 어디 가? 현우도 엄마랑 같이 갈래.” 그 작은 말이 내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아주머니가 내 손을 잡고 조용히 속삭였다. “걱정 마요. 내가 내 자식처럼 보살필게요. 그 애 이름은 제가 ‘정우’라고 부르려고요. 새로운 시작이니까. 언젠가 이 전쟁이 끝나면, 그땐 꼭 다시 만나요.”
열차 문이 열리고, 나는 현우를 아주머니 품에 안겨주었다. 아주머니는 아이의 작은 몸을 품에 안고 열차 안으로 사라졌다. 현우가 마지막으로 나를 돌아봤을 때, 그의 눈은 이미 희미해지는 기차 창문 너머로 멀어져 가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열차가 기적을 울리며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내 작은 별, 현우. 아니, 이제 정우가 된 내 아들. 그 아이가 따뜻한 곳으로 가기를, 부디 행복하게 살기를, 그 작은 몸이 아프지 않기를 빌고 또 빌었다. 그리고 나는, 그날 이후, 내 삶의 가장 큰 조각을 잃어버린 채 살아야 했다.
일기장의 글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어서 흐느낌이 섞인 듯한, 삐뚤빼뚤한 글씨로 한 문장이 더 적혀 있었다.
… 그 애를 보낸 뒤, 나는 매일 밤 꿈속에서 그 애의 작은 손을 잡았다. 혹시 그 애가 나를 미워할까 봐, 혹시 내가 약속을 지키지 못할까 봐… 잊지 못할 이름, 현우. 그리고 정우.
지우는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할머니의 젊은 시절, 전쟁이라는 비극 앞에서 사랑하는 아들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한 여인의 처절한 희생. 지우는 눈물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일기장을 움켜쥐었다. 할머니가 평생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아픔이, 마치 뜨거운 불꽃처럼 지우의 심장을 태우는 듯했다.
지우는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할머니가 늘 자신을 끔찍이 아끼고 사랑했던 이유, 그리고 가끔씩 허공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슬픔에 잠기곤 했던 이유를. 그것은 단순한 외로움이 아니라, 깊이 파묻힌 그리움과 죄책감의 그림자였던 것이다. 현우, 아니 정우. 할머니에게 아들이 있었다니. 그리고 그 아들을 보내야만 했다니.
지우는 문득 일기장 페이지 사이에 뭔가 얇고 바스락거리는 것이 끼어 있음을 알아차렸다. 할머니의 글씨가 쓰인 곳과 다른, 접힌 흔적이 많은 작은 종이였다. 조심스럽게 꺼내보니, 그것은 낡고 바랜 사진 한 장이었다. 사진 속에는 갓난아기와 같은 작은 아이가 포대기에 싸여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누워 있었다. 아이의 손에는 작은 나뭇가지가 쥐어져 있었고, 배경은 오래된 기와집 처마 밑인 듯 보였다. 사진 뒤편에는 옅은 연필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정우. 새 가족과 함께. 1954년 봄. 함양.”
함양. 그곳은 할머니의 고향 근처였다. 지우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이것은 단순한 추억의 조각이 아니었다. 할머니가 아들을 보낸 후에도 그 아이의 안녕을 확인하려 애썼다는 증거. 어쩌면 그 아이는… 아직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의 불꽃이 지우의 가슴속에서 타올랐다.
지우는 사진을 든 채 숨을 헐떡였다.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은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었다. 그것은 끝나지 않은 이야기, 아직 매듭지어지지 않은 실타래였다. 할머니가 평생 숨겨온 비밀, 그리고 그 비밀 속에서 피어난 아들을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 지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제 이 이야기를 끝낼 사람은 자신이었다. 할머니의 마지막 소원, 아니 어쩌면 할머니도 알지 못했던 희망을 찾아 나설 차례였다. 함양, 그리고 정우. 지우는 반드시 그 모든 것을 알아내야만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