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고독 속, 희미한 등불을 찾아
지우는 흐릿한 시야를 억지로 부여잡았다. 창밖은 온통 하얀 눈보라로 뒤덮여 있었다.
도로는 이미 거대한 설원으로 변해 있었고, 차들은 거북이걸음으로 겨우 기어가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 발목을 붙잡는 눈송이 하나하나가 하윤에게 닿는 시간을 한없이 늘리고 있었다.
손에 든 낡은 사진 속 하윤의 웃음이 점점 희미해지는 것 같아, 지우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하윤아, 제발… 조금만 더 버텨줘.”
그녀의 목소리는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맥없이 흩어졌다.
벌써 사흘째였다. 민준에게서 온 믿을 수 없는 연락을 받은 뒤로, 지우는 단 한 순간도 편히 숨 쉬지 못했다.
북쪽 끝자락, 거의 버려지다시피 한 요양 병원에 하윤이 있다는 소식.
그가 병마와 싸우고 있다는 잔인한 진실. 왜 이제서야? 왜 아무 말도 없이 홀로 고통받고 있었던 걸까.
수많은 의문이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지금은 그 어떤 물음도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하윤에게 닿아야 한다는 절박함만이 그녀를 지탱하고 있었다.
차창에 머리를 기댔다. 차가운 유리창 너머로 쏟아지는 눈송이들이 마치 그날의 기억처럼 선명하게 다가왔다.
차가운 공기, 발이 푹푹 빠지던 눈밭, 그리고 마주 잡았던 두 손.
그 겨울, 눈꽃 아래 맹세한 약속
“지우야, 너와 나는 영원히 함께할 거야. 어떤 시련이 와도, 이 눈꽃처럼 아름다운 약속은 변치 않아.”
그는 그렇게 말했었다. 하얀 입김을 뿜으며, 두 눈은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였다.
열아홉 살의 하윤은 세상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는 듯 굳건했다.
지우는 그의 손을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약속은 두 사람의 삶을 관통하는 거대한 맹세가 되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들을 가만두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이별, 오해, 그리고 침묵의 세월.
그 약속은 지우의 심장에 박힌 채, 때로는 아물지 않는 상처로, 때로는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남아 있었다.
“젠장!”
갑작스러운 급정거에 지우는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앞차가 완전히 멈춰 서 있었다. 도로를 가로막은 거대한 눈더미. 더 이상 차로는 전진할 수 없었다.
지우는 운전사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건네고는 급히 차에서 내렸다.
매서운 한파가 삽시간에 그녀의 온몸을 휘감았다.
눈은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렸고, 이미 무릎까지 쌓인 눈은 걷는 것조차 힘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정신없이 눈길을 헤치고 나아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손발의 감각이 무뎌지고 폐가 얼어붙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어느 순간 발이 미끄러져 눈밭에 고꾸라졌다.
차가운 눈이 얼굴을 파고들었지만, 그녀는 일어설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흐느꼈다.
너무나 멀었다. 너무나 늦은 걸까.
그녀의 마음속에 쌓여있던 오랜 후회와 절망이 눈보라와 함께 터져 나왔다.
차가운 문턱, 희미한 온기
“지우 씨! 지우 씨!”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 민준이었다.
그는 지우가 올 것을 알고 미리 마중 나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의 모습은 지우에게 기적과 같았다. 민준은 지우를 부축해 일으키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괜찮으세요? 이 눈보라에 어떻게 여기까지…”
“하윤… 하윤은요? 괜찮아요?”
지우는 그의 말을 끊고 다급하게 물었다.
민준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그녀의 심장을 얼어붙게 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가, 이내 지우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위독합니다. 의식을 잃은 지 며칠 됐어요.”
지우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얼어붙었다.
그녀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솟구쳤지만, 차가운 바람에 닿자마자 얼어붙는 듯했다.
민준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빨리 안으로 들어가죠. 몸이 얼겠어요.”
낡은 병원 복도는 스산하고 적막했다.
희미한 조명 아래, 차가운 공기가 코끝을 맴돌았다.
민준이 안내한 병실 문을 열자, 익숙하면서도 낯선 하윤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창가에 놓인 침대에 누워 있었다.
수많은 관들이 그의 몸에 연결되어 있었고, 기계음만이 규칙적으로 병실을 채웠다.
하윤의 옆에는 한 명의 간호사가 앉아 그를 돌보고 있었다.
지우는 천천히 하윤에게 다가갔다.
마른 손, 핼쑥한 얼굴. 그에게서 풍기던 특유의 활기찬 기운은 온데간데없었다.
그저 고요하고 희미한 숨결만이 그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지우는 조심스럽게 하윤의 손을 잡았다.
차가웠다. 살아 있지만 마치 얼음처럼 차가운 그의 손에서 지우는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늦었는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잃었는지를 깨달았다.
“하윤아… 나 왔어. 지우 왔어.”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나 가늘어,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 조각 같았다.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저 기계음만이 그녀의 애타는 마음을 비웃는 듯 이어질 뿐이었다.
간호사는 조용히 병실을 나갔고, 민준은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지우는 하윤의 손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모든 미안함, 그리움, 그리고 사랑이 눈물과 함께 쏟아져 내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하윤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의 창백한 얼굴 위로, 밖에서 스며들어오는 차가운 눈빛이 희미하게 비쳤다.
바로 그때였다.
하윤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지우의 눈이 크게 뜨였다. 착각일까?
“하윤아…?”
그녀가 다시 그의 이름을 부르자, 하윤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마치 깊은 잠에서 깨어나려는 듯, 희미하지만 분명한 반응이었다.
지우의 심장이 격렬하게 울렸다.
“하윤아! 나야! 지우야!”
그녀는 그의 손을 잡은 채 간절히 부르짖었다.
밖에서는 눈이 여전히 쉼 없이 내리고 있었다.
마치 그날의 약속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려는 듯, 하얀 눈꽃들이 창문을 두드렸다.
이 고독한 병실에서, 차가운 겨울 눈꽃 아래, 새로운 기적의 씨앗이 움트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이 지독한 슬픔 속에서 다시 한번 약속의 맹세를 되새겨야 하는 걸까.
지우는 하윤의 희미한 온기를 붙잡은 채, 창밖의 눈보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하윤의 손을 놓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설령 그 약속이 또다시 거친 눈보라 속에 휘말린다 해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