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훈은 허름한 낡은 필름 카메라를 든 채, 빗물이 고인 골목길의 어귀에 서 있었다. 그의 눈빛은 굳게 닫힌 낡은 철문과 그 위에 녹슨 채 매달린 간판, ‘추억 사진관’이라는 글씨에 못 박혀 있었다. 일주일 전, 우연히 발견한 서윤의 낡은 일기장 마지막 페이지에 깨알같이 적혀 있던 장소. 그 이름은 잊힌 시간의 조각처럼 지훈의 심장을 찢어 놓았다.
“서윤… 네가 이곳에 무엇을 남겼을까.”
낮은 목소리가 빗소리에 묻혔다. 72번째의 아침, 그는 여전히 그녀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빗방울은 그의 오래된 탐정 코트 위로 미끄러져 내렸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마르지 않는 그리움이 고여 있었다. 이곳은 서윤이 사라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장소 중 하나로 추정되는 곳이었다. 일기장의 여백에는 흐릿하게 그려진 스케치와 함께 ‘그때의 나’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지훈은 조심스럽게 철문을 밀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낡은 건물 전체에 울려 퍼졌다. 내부는 생각보다 넓었고, 습하고 오래된 종이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먼지 쌓인 진열장에는 빛바랜 사진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흑백 사진 속 사람들의 표정은 모두 행복해 보였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영원히 멈춰버린 듯했다.
카메라를 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훈은 마치 시간 여행자가 된 것처럼 조심스럽게 내부를 둘러보았다. 한쪽 벽에는 여러 크기의 사진 액자들이 걸려 있었고, 그중 일부는 비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중요한 기억을 빼내 간 것처럼. 그의 눈은 서윤의 흔적을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낡은 카운터 뒤편에는 작은 문이 있었고, 그 안쪽에서 옅은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지훈은 심호흡을 했다. 매번 새로운 단서를 발견할 때마다 찾아오는 불안감, 기대감, 그리고 실망감이 뒤섞인 감정의 파도에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서윤이 직접 남긴 단서. 그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닐 터였다.
그가 문을 열자, 오래된 목재 마루가 삐걱거렸다. 내부는 작업실인 듯했다. 현상액 냄새가 희미하게 풍겼고, 벽에는 필름이 널려 있었다. 그리고 그 방의 중앙, 낡은 작업대 위에 놓인 한 장의 사진이 지훈의 시선을 강하게 잡아끌었다. 먼지 쌓인 유리 액자 속에서, 앳된 미소를 짓고 있는 서윤의 얼굴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시간이 멈춘 듯했다. 사진 속 서윤은 고등학교 시절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교복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햇살 아래 눈부시게 웃고 있었다. 마치 어제 찍은 사진처럼 선명했다. 지훈의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파왔다. 그는 손을 뻗어 사진을 어루만졌다. 차가운 유리 너머로 느껴지는 온기 없는 감촉이 현실의 잔인함을 일깨웠다.
그때, 뒤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손님, 여기는 이미 문 닫은 지 10년도 더 된 곳인데….”
지훈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꼬장꼬장해 보이는 백발의 노인이 작업실 입구에 서 있었다. 그의 눈은 흐릿했지만, 지훈의 손에 들린 필름 카메라를 보더니 이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오래된 카메라를 들고 온 걸 보니, 사진에 진심인 분이신가 보군요.”
“아, 저는… 탐정 김지훈입니다. 혹시 이 사진관의 주인이신가요?” 지훈은 얼른 명함을 내밀었다. 노인은 돋보기를 꺼내 명함을 자세히 읽어보았다.
“탐정이라… 허허. 저는 여기 ‘추억 사진관’의 마지막 주인이자 첫 주인이었습니다. 송영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곳에 무슨 볼일이신가요? 이젠 사진도 찍지 않고, 그저 낡은 유품처럼 남아 있는 곳인데.”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래전 이곳에 방문했던 사람인데… 혹시 이 소녀를 기억하십니까?” 지훈은 서윤의 사진을 조심스럽게 들어 노인에게 내밀었다. 노인의 눈은 사진 속 서윤의 얼굴에 멈췄고, 그의 흐릿한 눈동자에 옅은 회상이 스치는 듯했다.
“아이고… 이 아이는… 기억나고말고. 내 마지막 손님 중 하나였지. 맑은 눈을 가진 아이였어. 꼭 저 꽃 같았지.”
지훈은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마지막 손님이요?”
“그랬지. 이 사진을 찍어주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병이 나서 이곳 문을 닫았으니까. 꽤 오랫동안 병원에 있었어. 그래서 이 사진도 찾아가지 못했지. 가끔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 저리 밝게 웃는 아이였는데…” 송영훈 노인은 사진 속 서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이 소녀에 대해 아는 것이 더 있습니까? 이름은 서윤입니다.”
“서윤이라… 아, 그 이름은 기억나는군. 참 예쁜 이름이었지. 그 아이가 사진을 찾아가지 못한 걸 알고, 한참 뒤에 다른 사람이 찾아왔었네. 저 아이를 아는 사람이라고.”
지훈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또 다른 사람? 누가? 서윤의 실종 이후, 그녀를 찾던 것은 자신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언제쯤이었죠?”
“음… 정확히 언제라고 말하기는 어렵네. 내가 병원에서 막 퇴원하고, 이 사진관을 정리하던 때였으니… 한 5년 전쯤이었을 거야. 여학생 하나가 찾아왔었지. 저 서윤이라는 아이의 친구라고 했어. 사진을 찾아가고 싶다고 하더군. 그런데 난 그 사진을 내주지 않았어.”
노인의 말에 지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요?”
“그 학생의 표정이 어딘가 슬퍼 보였거든. 사진을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이 사진을 보고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한 눈빛이었어. 그래서 그냥 가지고 있으라고 했지. 언젠가 서윤이라는 본인이 직접 찾아올 것이라고.” 노인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결국, 서윤은 오지 않았네. 대신 이 사진은 이대로 이곳에 남았고.”
“그 여학생의 인상착의를 기억하십니까? 혹은 혹시 이름을 들으셨나요?” 지훈은 다급하게 물었다. 5년 전. 서윤이 사라진 지 한참이 지난 후에, 그녀의 친구가 이곳을 찾아왔다니. 이것은 분명 새로운 실마리였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군. 미안하네. 하지만 인상착의는 어렴풋이 기억나. 서윤이보다는 키가 조금 작았고, 단발머리였어. 그리고… 눈매가 아주 날카로웠지. 슬픔이 가득한 날카로운 눈. 어딘가 서윤이와는 많이 다른 분위기였어.”
단발머리, 날카로운 눈매, 슬픔. 지훈은 머릿속에서 아는 사람들의 얼굴을 빠르게 스캔했다. 서윤의 친구들 중 그런 인물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서윤의 친구들 대부분은 졸업 후 연락이 끊기거나 해외로 떠났다. 그가 마지막으로 만났던 친구는 서윤의 행방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혹시 그 친구가 찾아왔을 때, 서윤의 안부에 대해 물어보지 않으셨습니까?”
“물어봤지. 왜 서윤이가 직접 찾아오지 않느냐고. 그 학생은 그냥… 서윤이가 바쁘다고만 했어. 그리고 자신은 이 사진이 필요 없다고, 서윤에게 직접 전해줄 거라고 하더군. 그래서 내가 이 사진을 본인에게 전달해 주라고 했지. 하지만 그 친구는 가져가지 않았어. 뭔가 이상했지.” 노인은 자신의 말을 되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알겠습니다. 노인장, 이 사진을 제가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그리고… 혹시 서윤의 연락처나 다른 정보가 담긴 것이 있을까요? 설마 하는 마음이지만…”
“음… 연락처는 따로 남기지 않았어. 그런데 서윤이가 한 가지 독특한 것을 부탁했지. 이 사진을 현상할 때, 이 필름과 함께 다른 사진 몇 장도 같이 현상해 달라고. 본인이 가지고 온 필름이었는데, 뭔가 급하게 찍은 듯한 사진들이었어. 인물 사진이 아니라 풍경 사진들.”
노인은 작업대 아래 서랍을 열더니, 낡은 봉투 하나를 꺼냈다. 그 속에는 여러 장의 빛바랜 사진이 들어 있었다. 모두 흑백 사진이었다. 지훈은 조심스럽게 사진들을 꺼내 살펴보았다. 오래된 놀이터 미끄럼틀, 벽에 그려진 낙서, 한적한 기차역 승강장, 그리고… 작은 돌담길 옆에 서 있는 벚나무 한 그루.
지훈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 모든 풍경이 익숙했다. 특히 벚나무 사진은 그의 심장을 강하게 울렸다. 그것은 지훈과 서윤이 처음 만났던 동네 어귀의 벚나무였다. 그들은 그 벚나무 아래에서 매년 봄을 맞이했고, 그 나무 아래에서 첫 키스를 나누었다.
“이곳은… 제 기억 속에 있는 곳과 같습니다. 서윤이 고향 근처입니다.” 지훈은 사진을 든 채 희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랬겠지. 서윤이도 이 사진들을 보고 무척 아쉬워했던 기억이 나는군. 이 장소들을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노인은 사진 속 풍경들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무언가 중요한 기억을 담으려는 듯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었지. 그리고 슬픈 표정으로 이 사진들을 보고 있더군.”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요?” 지훈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 말은 마치 서윤이 고향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의미처럼 들렸다. 아니, 어쩌면 더 멀리, 영영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날 계획이었던 것일까.
그때, 한 장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다른 사진들과 달리, 뒷면에 희미하게 연필로 쓰인 글씨가 있었다. ‘두 번째 발자국이 닿는 곳. – ㅅㅇ’
“두 번째 발자국이 닿는 곳.” 지훈은 그 문구를 몇 번이고 되뇌었다. ‘ㅅㅇ’는 분명 서윤의 초성이었다. 두 번째 발자국이라니? 그들의 어린 시절 기억 속에 있는 어떤 장소를 의미하는 것일까? 아니면 서윤이 그녀만의 방식으로 남긴 새로운 메시지일까?
지훈의 심장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뛰었다. 낡은 사진관에서 발견한 서윤의 사진, 그리고 그녀가 남긴 의미심장한 풍경 사진들. 그리고 무엇보다, 5년 전 서윤의 친구라는 사람이 이곳을 다녀갔다는 사실. 단발머리에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그 친구는 대체 누구일까? 그리고 왜 서윤의 사진을 가져가지 않았으며, 왜 그토록 슬픈 눈을 하고 있었을까?
지훈은 사진들을 조심스럽게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72번째 밤이 깊어갈수록, 잃어버린 첫사랑의 그림자는 더욱 선명해지는 동시에, 또 다른 미스터리의 장막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는 다시금 비 내리는 골목길로 나섰다. 그의 발걸음은 사진관을 떠났지만, 그의 영혼은 여전히 서윤이 남긴 낡은 추억의 조각들 속에 갇혀 있었다.
‘두 번째 발자국이 닿는 곳.’ 그 문구가 빗소리처럼 그의 귓가에 끊임없이 울렸다. 그곳이 어디든, 그는 기필코 찾아내리라 다짐했다. 잃어버린 첫사랑 서윤을 만나기 위한 다음 발걸음은, 과연 어디로 향해야 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