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푸른빛이 희미하게 스튜디오 창문을 파고들었다. 은서는 찰흙으로 빚어낸 조각상 앞에서 붓을 든 채 멈춰 서 있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섬세하게 피어난 형상은 절망과 희망이 뒤섞인 듯 모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난 며칠 밤낮으로 이 작업에 매달렸지만, 이상하게도 마지막 한 획을 그을 수가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이 손목을 잡아끄는 것만 같았다.
어둠 속을 가르는 기차의 진동처럼, 예고 없는 소식이 그녀의 평온한 일상을 뒤흔들었다. 하준의 회사가 예상치 못한 대형 스캔들에 휘말렸다는 속보였다. 몇 년 전 그가 모든 것을 걸고 추진했던 재개발 프로젝트에 대한 불법 로비 의혹이 터져 나온 것이다. 세상은 하준을 향해 손가락질했고, 그들의 지난 시간들이 마치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림자 속으로
하준은 그 소식이 터진 이후로 모습을 감췄다. 연락조차 닿지 않았다. 은서는 핸드폰을 든 채 밤새도록 잠 못 이루고 뒤척였다. 뉴스 기사에는 그의 냉정한 얼굴이 인쇄되어 있었지만, 은서가 아는 하준은 세상이 말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혹은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그림자 속으로 숨어버린 것인지도 몰랐다.
“하준…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은서는 차가운 스튜디오 바닥에 주저앉아 무릎을 끌어안았다. 고요한 공간 속에서 심장이 불규칙하게 요동치는 소리만이 또렷하게 들렸다. 그와 처음 만났던 밤기차 안의 그 고요함과는 너무나도 다른 종류의 정적이었다. 그때의 정적은 낯선 이들 사이에 피어나는 은밀한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지금의 정적은 텅 빈 공포만이 맴돌았다.
그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였던가. 일주일 전, 그가 잠시 스튜디오에 들러 그녀의 작업 과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순간이었다. 그때 그의 눈빛에 스쳐 지나가던 그림자를 은서는 미처 읽어내지 못했다. 늘 그랬다. 그는 늘 자신을 헌신적으로 사랑했지만, 동시에 늘 무언가를 숨기고 지키려 애썼다. 그녀는 그에게서 어떤 부분은 영원히 낯선 타인으로 남겨져 있다는 사실을 언제나 감지하고 있었다.
밤기차의 약속
문득, 까마득히 오래전 그 밤기차 안에서의 대화가 떠올랐다.
“세상 모든 것이 무너진다 해도, 우리 둘만은 서로의 편이 되어주자.”
하준은 그렇게 말했었다. 그의 목소리는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어둠처럼 깊고 단단했다. 그 약속 하나로 은서는 지금껏 모든 폭풍우를 견뎌왔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폭풍우의 중심에 그가 있었고, 그녀는 속수무책으로 바깥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조각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형상은 여전히 미완의 상태였다. 완성되지 못한 채로 멈춰버린 이 형상이 마치 자신들의 관계를 대변하는 것 같아 가슴이 미어졌다. 이대로 모든 것이 멈춰 버릴까 봐 두려웠다. 그에게 다가가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했다. 더 이상 혼자서 버티게 둘 수는 없었다.
밤이 깊어지자, 스튜디오 문이 조용히 열리고 익숙한 향기가 스며들었다. 하준이었다. 그의 얼굴은 며칠 새 바싹 말라 있었고, 깊어진 눈가의 그림자는 그의 고뇌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짙은 피로와 함께 형언할 수 없는 죄책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은서야…”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그는 마치 죄인처럼 문턱에 서서 그녀에게 다가오지 못했다. 은서는 천천히 일어섰다. 그녀의 눈빛은 흔들림 없었지만, 그 속에는 오래된 슬픔과 굳은 다짐이 함께 섞여 있었다.
“하준. 왜 이제 왔어. 왜 혼자서 모든 걸 감당하려고 해?”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어떤 비난보다 더 날카롭게 그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하준은 고개를 숙였다.
“널 지키고 싶었어. 이 더러운 진흙탕에 네가 발 디디는 것을 원치 않았어.”
“나도 당신을 지키고 싶어. 우리의 시간을, 밤기차에서 시작된 우리의 인연을. 당신 혼자서 지켜낼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은서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 속에서 그녀는 과거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가 수없이 고통스러워하며 지켜내려 했던 것들. 그리고 그가 숨기려 했던 진실의 파편들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하준은 결국 무릎을 꿇었다. 그의 어깨는 무너져 내리는 듯 떨리고 있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의 흐느낌이 스튜디오의 정적을 깨뜨렸다. 은서는 천천히 다가가 그의 어깨를 감쌌다. 그의 등은 이전보다 훨씬 더 앙상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손길이 닿자 하준은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오랜 시간 그를 짓눌러왔던 모든 무게가 그의 어깨에서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그가 털어놓지 못했던 진실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던 프로젝트 자금을 자신이 막기 위해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내용이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명의로 모든 책임을 지기 위해 서류를 조작했고, 이제 와서 그 조작된 서류가 자신을 올가미로 조여오는 상황에 처한 것이었다.
“그럴 필요 없었잖아… 왜 혼자서 그 모든 짐을…”
은서의 목소리도 함께 떨렸다. 그녀는 그가 얼마나 자신과 회사를 지키려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의 선택이 옳았든 그르든, 그에게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의 중심에는 언제나 그녀가 존재했다.
그 순간, 스튜디오 창문 밖으로 희미한 불빛 하나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밤기차였다. 어둠 속을 가르며 어디론가 향하는 그 불빛은 마치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그들의 운명처럼 느껴졌다. 은서는 하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시선은 밤기차가 사라지는 어둠의 끝자락에 닿아 있었다. 그곳에는 어떤 진실이, 어떤 미래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까. 그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 낯선 밤기차에서 시작된 인연은, 이제 어떤 파도 속에서도 함께 나아갈 단단한 동반자가 되어 있었다. 스캔들의 불똥이 어디까지 튀어 오르든, 그들은 함께 맞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제 시작이었다. 진정한 싸움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