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으로는 희미한 겨울 햇살이 비쳤지만, 병실 안의 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갑고 무거웠다. 기계음만이 규칙적으로 그 적막을 깨트리고 있었다. 은수는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가느다란 손목에는 수액 줄이 연결되어 있었고, 그 마저도 위태로워 보였다. 지훈은 그녀의 곁에 앉아 손을 잡고 있었다. 그의 손은 따뜻했지만, 그의 마음은 한겨울의 칼바람처럼 시렸다.
“괜찮아, 은수야.”
그는 속삭였지만, 그 말조차 공허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이 고여 있었다. 어제 의사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귓가에 맴돌았다. ‘진행이 빠릅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습니다.’ 그 말은 지훈의 세상 전체를 뒤흔들어 놓았다.
그는 가만히 은수의 뺨을 어루만졌다. 얇아진 살결 아래로 느껴지는 뼈마저 아프게 다가왔다. 기억은 언제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미끼 삼아 고통의 나락으로 끌어당기는 법이었다. 지훈의 눈앞에 어느새 오래전 겨울날의 풍경이 선명하게 펼쳐졌다.
얼어붙은 시간 속의 맹세
그날은 유난히 눈이 많이 오던 날이었다. 펑펑 쏟아지는 눈송이들이 세상을 온통 하얗게 뒤덮었고, 발자국을 남길 때마다 ‘뽀드득’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앳된 얼굴의 은수와 지훈은 함께 눈밭을 걸으며 미래를 꿈꿨다. 하얀 입김이 피어오르는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만은 따뜻한 불꽃처럼 타올랐다.
“지훈아, 봐! 눈꽃이 정말 예쁘지?”
은수가 두 손으로 받아 든 눈송이를 내밀며 해맑게 웃었다. 그녀의 눈은 반짝이는 눈꽃보다 더 빛나고 있었다.
“응, 너처럼 예뻐.”
지훈은 웃으며 그녀의 코끝에 묻은 눈을 닦아주었다. 그 순간, 바람에 실려온 눈송이 하나가 은수의 속눈썹에 내려앉았다. 그녀는 눈을 깜빡였고, 눈꽃은 이내 투명한 물방울로 변해 사라졌다.
“우리, 나중에 저기 저 언덕 위에 작은 집 짓고 살자. 아침마다 네가 끓여주는 커피 마시고, 밤에는 별 보면서 이야기하는 거야.”
은수가 멀리 보이는 언덕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훈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그래.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우리는 함께할 거야. 평생을 같이 하자, 은수야. 이 눈꽃이 흩어지는 한이 있어도, 우리의 약속은 변치 않을 거야.”
그때 지훈의 목소리는 굳건했고,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었다. 은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훈의 품에 안겼다. 두 사람 위로 하염없이 눈꽃이 흩날렸다. 그 약속은 너무나 순수하고 굳건하여, 세상의 어떤 고난도 이겨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병실의 한숨, 희미해지는 미래
현재로 돌아온 지훈은 눈을 감았다. 그날의 눈꽃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차가운 병실의 현실만이 그의 뺨을 때렸다. 은수의 희귀병은 서서히 그녀의 기억을 갉아먹고 있었다. 처음에는 사소한 건망증이었지만, 이제는 지훈의 이름조차 가끔 잊어버릴 정도로 진행되었다. 의사는 수술이 유일한 희망이라고 했지만, 그마저도 성공률이 낮았고, 만약 실패한다면 은수는 영영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다.
“지훈아…”
은수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지훈이 눈을 뜨자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응, 은수야. 무슨 생각해?”
“우리, 저 언덕 위에서 함께 살기로 했었지?”
그녀의 질문에 지훈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가 그날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불안정했다. 마치 안개 낀 강가를 헤매는 배처럼, 기억의 파편들을 더듬는 듯했다.
“그럼. 당연하지. 너랑 나, 둘이서. 언덕 위에서 예쁜 집 짓고, 매일 아침 같이 해 보면서….”
지훈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그녀가 알아챌까 봐 두려웠다.
“나, 가끔 무서워. 내가 너를, 우리를 잊어버릴까 봐.”
은수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기억을 붙잡으려는 듯 손을 꽉 쥐었다.
“절대 그런 일 없을 거야. 내가 네 옆에 계속 있을 거야. 네가 나를 잊으면, 내가 다시 알려줄게. 수백 번, 수천 번이라도.”
지훈은 은수의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의 눈빛은 그날의 약속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심장 속에는 두려움이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수술을 강행해야 할까? 아니면 그녀의 남은 기억들을 붙잡고 현재를 살아가야 할까? 어떤 선택이 그녀를 위한 최선일지 알 수 없었다.
선택의 기로, 다시 내리는 눈꽃
밤이 깊어지고, 창밖에는 가느다란 눈발이 다시 날리기 시작했다. 은수는 수면제 덕분에 잠이 들었다. 지훈은 잠든 그녀의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희미한 달빛이 그녀의 잠든 얼굴을 비췄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그녀를 지키고 싶었다. 그 옛날 눈꽃 아래 맹세했던 것처럼.
결국 지훈은 마음을 굳혔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녀의 기억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볼 수는 없었다. 비록 희망이 희박하고 위험이 따르더라도, 그는 마지막까지 싸울 결심을 했다. 은수에게는 함께 꿈꿨던 미래를 되찾아줄 기회가 필요했다.
다음 날 아침, 지훈은 의사를 만났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단호했다.
“교수님, 수술 진행해 주세요. 은수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어떤 위험이라도 감수하겠습니다.”
의사는 지훈의 결심에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힘든 결정이었을 겁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지훈은 병실로 돌아왔다. 은수는 깨어 있었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슬픔으로 가득했지만, 그 안에서 아주 작은 희망의 불꽃을 보았다. 지훈은 그녀의 침대 곁에 앉아 손을 잡았다.
“은수야, 우리 수술하자.”
은수의 눈이 흔들렸다. 두려움과 망설임이 그녀의 얼굴에 스쳤다.
“정말… 괜찮을까?”
“괜찮아. 내가 옆에 있을게. 이 손 놓지 않을 거야. 우리의 약속, 기억나지?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우리는 함께할 거야.”
지훈은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그의 눈빛은 굳건했고, 그 속에서 그녀는 어린 시절, 눈꽃이 흩날리던 언덕 위에서 맹세했던 강인한 사랑을 다시 보았다. 창밖으로는 또다시 하얀 눈꽃이 희미하게 내리고 있었다. 마치 그날의 약속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려는 듯이. 그러나 이번 눈꽃은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차가운 겨울 바람처럼, 그들의 선택이 가져올 미지의 두려움을 동반하고 있었다.
은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손이 지훈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들의 눈빛이 마주쳤을 때, 그들의 심장은 다시 하나가 되어 뛰는 듯했다. 하지만 수술실 문이 열리는 순간, 그들은 과연 그날의 약속을 온전히 지켜낼 수 있을까? 다음 겨울에도 함께 눈꽃을 맞이할 수 있을까? 지훈은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은수의 손을 더 강하게 잡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