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이 전해준 소식 – 제82화

어스름 속 작은 그림자

봄바람은 언제나 그러했듯, 망설임 없이 창문을 두드렸다. 지난 겨울의 스산함을 털어내려는 듯, 앙상했던 나뭇가지 위에도 연둣빛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는 계절이었다. 서윤은 작업실 창가에 기대어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먼 산자락을 바라보고 있었다. 붓을 쥔 손에는 힘이 없었고, 캔버스 위에는 며칠째 미완의 풍경화가 침묵처럼 놓여 있었다. 그녀의 마음속 풍경 역시 그랬다. 평온한 듯 보였지만, 깊이를 알 수 없는 물밑에서 끊임없이 무언가가 일렁이고 있었다.

오래 전, 세상의 모든 빛을 삼켜버린 듯했던 그날 이후, 서윤의 시간은 마치 멈춘 것 같았다. 동생, 지우. 그 이름은 아직도 그녀의 심장을 찢어내는 칼날처럼 아팠다. 봄이 올 때마다, 살랑이는 바람이 볼을 스칠 때마다, 마치 지우가 속삭이듯 귓가에 맴도는 환청을 듣곤 했다. 하지만 그건 그저 서윤의 애끓는 그리움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라고, 그녀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수없이 되뇌었다.

바람이 전한 온기

그날 오후, 서윤은 답답한 마음에 작업실을 나섰다. 오래된 고택의 정원은 그녀에게 유일한 안식처였다. 돌담을 따라 피어난 이름 모를 들꽃들이 고개를 내밀고, 낡은 벤치 위에는 따스한 햇살이 내려앉아 있었다. 서윤은 벤치에 앉아 눈을 감았다. 바람이 불어와 뺨을 간지럽히고,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그 바람 속에서, 서윤은 문득 희미한 나무 향을 맡았다. 익숙하면서도 잊고 지냈던, 아련한 향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바람이 휘감고 지나간 벤치 아래, 흙더미 위로 작은 무언가가 드러나 있었다.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흙을 걷어내자, 닳고 닳은 나무 조각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작고, 투박하게 깎인 새 모양의 조각이었다. 서윤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듯했다.

이것은… 지우가 어릴 적, 틈만 나면 손에 쥐고 놀았던 작은 나무 새였다. 삐뚤빼뚤 서툰 솜씨로 깎여 있었지만, 그 시절 지우의 미소만큼이나 순수했던 흔적. 서윤은 떨리는 손으로 나무 새를 움켜쥐었다. 차갑게 식어버린 나무 조각에서, 그녀는 마치 지우의 체온을 느끼는 듯했다.

그때였다. 다시 한번 봄바람이 강하게 불어왔다. 바람은 벤치 옆 오래된 감나무 아래에 쌓여 있던 낙엽들을 휘몰아쳤고, 그 사이에서 얇고 빛바랜 종이 한 장이 펄럭이며 서윤의 발치로 떨어졌다.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그곳에 두고 간 것처럼.

종이를 주워들었다. 낡은 종이에는 희미한 글씨체가 인쇄되어 있었다. 몇 년 전 발행된 지역 소식지 조각이었다. 시력은 좋지 않았지만, 서윤의 눈은 단 한 단어에 꽂혔다.

해오름 보육원.”

그리고 그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10대 초반의 미아, 보호 중. 인상착의: 오른쪽 손목에 작은 점…’

서윤의 손이 덜덜 떨렸다. 지우의 오른쪽 손목에도, 분명히, 아주 작고 검은 점이 있었다. 세상에 그토록 흔한 인상착의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무 새, 그리고 이 종이 조각이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섬뜩한 일치였다.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것 같았다. 10대 초반이라니. 지우가 사라졌을 때 그는 고작 일곱 살이었다. 시간이 흘러 벌써 십 년 가까이 되었으니, 그 나이대가 맞을 수도 있었다.

희미한 실낱, 솟아나는 희망

서윤은 방으로 돌아와 낡은 일기장을 꺼냈다. 지우가 사라진 후, 그녀는 매일 밤 일기장에 자신의 절망과 그리움을 토해냈다. 마지막으로 적힌 날짜는 9년 전, 지우가 사라진 바로 그날이었다. 그 뒤로는 단 한 글자도 적을 수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녀의 심장 속에서, 너무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밤새도록 잠 못 이루고 뒤척였다. 이것이 또 다른 허망한 희망 고문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만약 사실이라면 이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 없다는 간절한 염원이 뒤섞여 그녀를 잠식했다. 해오름 보육원. 지우의 이름은 없었다. 하지만 그 인상착의와, 바람이 전해준 나무 새의 온기가 서윤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다음 날 아침, 서윤은 해가 뜨기도 전에 짐을 쌌다. 몇 벌의 옷가지와 지우의 사진 한 장, 그리고 어제 찾은 나무 새 조각을 가방에 넣었다. 보육원이 있는 곳은 이 마을에서 기차로 몇 시간 떨어진 먼 도시였다. 그곳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서윤의 마음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지우야… 혹시 정말 너일까?’

봄바람은 여전히 창밖을 스치고 있었다. 그 바람은 이제 더 이상 슬픈 기억의 메아리가 아니었다. 불확실하지만, 어쩌면 그녀에게 길을 알려주는 나침반이 될 수도 있는, 희미한 희망의 속삭임이었다. 서윤은 마지막으로 작업실을 돌아보았다. 미완의 풍경화는 여전히 침묵했지만, 그녀의 눈빛은 비로소 새로운 색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그녀는 길고 깊은 숨을 내쉬고, 문을 열고 나섰다. 9년 만에, 그녀의 발걸음은 비로소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 다음 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