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 제25화

자정의 시계탑이 긴 숨을 토하듯 열두 번의 종소리를 울리고, 서울의 밤은 그제야 비로소 본연의 고요를 찾아갔다. 유리창 밖으로는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이 보석처럼 박혀 있었고, 그 별빛은 텅 빈 스튜디오 안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따스한 온기를 머금은 지우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전파를 실었다.

“안녕하세요,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DJ 지우입니다. 오늘 밤도 이렇게 많은 분들이 함께 해 주셨네요. 혹시 지금 창밖을 내다보고 계신가요? 오늘은 정말 별이 쏟아질 것 같은 밤입니다.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은 별들처럼, 여러분의 마음속에도 반짝이는 무언가가 빛나고 있기를 바랍니다.”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스튜디오를 감돌았다. 지우는 헤드폰을 고쳐 쓰고, 손에 들린 사연 봉투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봉투는 꽤 두툼했고, 글씨체는 조금은 서툰 듯, 하지만 정성이 가득 담겨 있었다. 오늘 밤의 첫 번째 사연이었다.

“오늘 첫 번째 사연은 익명으로 보내주신 ‘밤하늘의 등대’ 님께서 주셨습니다. 밤하늘의 등대님, 감사합니다. 사연 읽어 드릴게요.”

지우의 목소리는 한층 더 부드러워졌다. 그녀는 눈을 감고 사연 속 이야기 속으로 침잠하려는 듯 보였다.

“지우 DJ님, 안녕하세요. 저는 잊고 살았던 오래된 약속 하나 때문에 요즘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고 있습니다. 스물다섯 해 전, 제가 초등학생이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저희 동네에는 저와 죽마고우처럼 지내던 민준이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몸이 약했던 민준이는 병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해맑게 웃던 아이였죠. 민준이의 작은 소원은 언제나 ‘별똥별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여름밤, 운이 좋게도 유성우가 쏟아지는 날이 있었어요. 민준이와 저는 동네 뒷산에 몰래 올라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죠. 수많은 별들이 쏟아지는 그 장관 속에서, 민준이가 제 손을 꼭 잡고 말했어요. ‘우리,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도 꼭 다시 여기서 만나자. 가장 밝은 별이 뜨는 날, 서로의 이야기를 들려주자.’ 저는 흔쾌히 그러겠노라고 약속했습니다. 그 어린 시절의 약속은 맹세처럼 제 마음에 새겨졌어요.”

지우는 잠시 숨을 고르며 사연을 읽는 속도를 늦췄다. 그녀의 눈빛은 아득한 기억을 더듬는 듯 촉촉하게 빛났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습니다. 민준이와 저는 다른 중학교로 진학했고, 저는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사업 때문에 멀리 타지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이사 준비로 정신없이 바빴고, 어린 마음에 헤어짐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던 저는 민준이에게 제대로 된 작별 인사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나중에 다시 만나자’는 막연한 약속만 남긴 채 떠나왔죠. 그 후로 저는 학업에 열중하고, 취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그 약속은 제 삶의 모퉁이 한편에 잊혀진 책처럼 놓여 있었습니다. 가끔 밤하늘을 올려다볼 때면 민준이와의 약속이 떠오르곤 했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애써 외면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얼마 전, 우연히 고향 친구를 만났습니다. 술잔을 기울이다 민준이 이야기가 나왔어요. 민준이는 제가 떠난 지 몇 년 후, 지병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 소식을 듣는 순간, 제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그토록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약속을 민준이는 혹시 기억하고 있었을까요? 제가 떠난 후, 홀로 뒷산에 올라 별똥별을 기다리지는 않았을까요? ‘가장 밝은 별이 뜨는 날’이 언제였는지, 민준이는 혹시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 약속을 붙들고 있었을까요?”

“고향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는 충격적이었습니다. 민준이가 마지막까지 손에서 놓지 않았던 낡은 일기장에는 제 이름과 함께 ‘가장 밝은 별이 뜨는 날, 친구와 다시 만나기로 했다. 그때까지 꼭 버텨야지’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는 걷잡을 수 없는 죄책감과 후회에 휩싸였습니다. 제가 민준이를 잊고 지내는 동안, 민준이는 저와의 약속을 삶의 마지막 희망처럼 붙들고 있었다니요. 저는 이제 누구에게 그 약속을 지켜야 할까요? 민준이가 없는 밤하늘 아래에서, 저는 어떤 별을 보며 민준이를 기억해야 할까요? 지우 DJ님, 저는 어떻게 해야 이 무거운 마음의 짐을 덜어낼 수 있을까요? 부디 저에게 작은 위로라도 건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밤하늘의 등대 드림.”

사연을 다 읽은 지우는 잠시 말이 없었다. 스튜디오 안에는 정적과 함께 먹먹한 슬픔이 감돌았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지우의 눈가에는 어느새 촉촉한 이슬이 맺혀 있었다.

“‘밤하늘의 등대’님, 사연 잘 들었습니다. 참 많이 힘드셨겠어요. 민준이라는 친구의 마지막까지 빛이 되었던 그 약속이, 이제는 등대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짐이 되었다는 사실이 저까지 가슴 먹먹하게 만드네요.”

지우는 잠시 말을 멈추고,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녀는 마음속 깊이 우러나오는 진심을 담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약속을 합니다. 때로는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고, 때로는 너무나 소중해서 잊고 싶지 않지만 세월 속에 잊혀가는 약속도 있죠. 등대님과 민준이의 약속은, 어린 시절의 순수한 마음이 만들어낸 가장 아름다운 약속 중 하나였을 겁니다. 민준이가 그 약속을 마지막까지 기억했다는 건, 등대님이 민준이에게 그만큼 소중한 존재였다는 증거예요. 그리고 그 약속이 민준이의 힘든 시간을 버티게 해준 작은 등불이었다는 사실은, 등대님에게 큰 위로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물론,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후회와 죄책감이 등대님을 힘들게 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민준이는 등대님이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고 해서 등대님을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민준이는 등대님이 자신을 기억해주고, 자신과의 약속을 가슴 깊이 새겨주고 있다는 사실에 기뻐할 거예요.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밤하늘의 가장 밝은 별이 되어, 등대님을 비추고 있을지도 모르죠. ‘가장 밝은 별이 뜨는 날’이라는 약속은, 물리적인 날짜를 넘어선 어떤 의미를 품고 있지 않을까요? 민준이의 마음속에서 가장 밝게 빛났던 별은, 어쩌면 등대님과의 우정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지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 역시 과거의 어떤 그림자를 떠올리는 듯했다.

“등대님, 이제는 민준이와의 약속을 다른 방식으로 지켜나가야 할 때입니다. 민준이가 살아가는 동안 등대님을 통해 얻었던 따뜻한 기억, 우정, 그리고 희망을 잊지 않는 것이 바로 그 약속을 지키는 일일 거예요. 민준이가 남긴 순수한 마음을 닮아, 주변 사람들에게 따뜻한 빛을 건네는 사람이 되는 것도 좋겠고요. 어쩌면 밤하늘의 등대님이라는 닉네임처럼, 민준이의 별빛을 이어받아 이 밤을 헤쳐나가는 누군가에게 작은 빛이 되어주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겁니다.”

“그리고 등대님만의 방식으로 민준이에게 편지를 써보는 건 어떨까요? 못다 한 이야기들, 후회되는 마음들, 그리고 고마웠던 마음들을 솔직하게 담아 별들에게 띄워 보내 보세요. 때로는 말로 다 하지 못하는 이야기들이 글 속에 담겨 더 큰 위로가 되기도 하니까요. 민준이는 등대님의 마음속에, 그리고 밤하늘의 가장 빛나는 별이 되어 영원히 함께할 것입니다. 그 별을 보며, 등대님은 더 이상 후회가 아닌, 아름다운 추억과 희망을 품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지우는 헤드폰을 벗어 잠시 내려놓았다. 손가락으로 눈가를 꾹 누르며 감정을 다스렸다. 스튜디오는 다시 고요해졌다. 그녀는 한 곡의 노래를 선곡하며 마지막 멘트를 준비했다.

“‘밤하늘의 등대’님, 오늘 밤 이 노래가 등대님께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민준이들에게도… 저는 다음 곡 들려드리면서 잠시 쉬어가겠습니다. 이적의 ‘다행이다’입니다.”

이적의 먹먹한 목소리가 스튜디오를 가득 채웠다. 지우는 음악이 흘러나오는 동안에도 창밖의 별들을 응시했다. 밤하늘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수많은 별들 중 유독 빛나는 하나의 별이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는 듯했다. 그녀의 마음속에도 오래전 잃어버린 작은 약속들이, 희미한 별빛처럼 다시금 떠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다음 사연을 읽기 위해, 그녀는 깊은 심호흡을 했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는 그렇게, 수많은 이들의 이야기와 슬픔, 그리고 희망을 싣고 밤새도록 흘러갈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