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마른 시간이 켜켜이 쌓인 먼지 속에서 희미한 빛이 깜빡였다. 지혁은 낡은 터미널의 전원부를 필사적으로 만지고 있었다. 닳고 닳은 손가락이 고대 유물과도 같은 회로를 더듬을 때마다, 퍽퍽한 공기 속에서 금속성 마찰음이 울렸다. 폐허가 된 시간 연구소, 시간의 흐름마저 멈춘 듯한 이곳에서 단 하나의 희망은 고철 더미가 된 기계들에 숨어 있는 과거의 파편이었다.
하윤은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녀의 눈은 어둠에 익숙해진 야생 동물처럼 날카로웠지만, 동시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상실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기억은 여전히 조각난 퍼즐 같았다. 간혹 스치는 섬광처럼 다가오는 파편들은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 뿐, 온전한 그림을 보여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 어둠 속에서 차가운 기운을 뿜어내는 기계들 사이에서, 그녀는 자신이 중요한 문턱에 서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손끝에서 맴도는 아득한 전율이, 잊힌 존재의 속삭임처럼 그녀의 심장을 건드렸다.
“이거 봐, 하윤아!”
지혁의 목소리가 정적을 깨고 터져 나왔다. 터미널의 낡은 화면에서 한 줄기 푸른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희미한 램프 불빛 아래서 그의 얼굴은 기대로 상기되어 있었다. 하윤은 천천히 그의 곁으로 다가섰다. 화면은 처음에는 의미 없는 문자열들을 토해내더니, 이내 정지된 이미지 하나를 띄웠다. 그것은 흐릿한 설계도면 같기도 하고, 어떤 장치의 내부 구조를 나타내는 그림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 중앙에, 낯설면서도 지독히도 익숙한 하나의 문양이 박혀 있었다.
그 문양을 보는 순간, 하윤의 온몸을 거대한 파도가 덮쳤다. 뇌리 속에서 잊혔던 기억의 회로가 억지로 연결되는 듯한 날카로운 고통이 덮쳐왔다.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쳤고, 폐부 깊숙이 자리한 공포가 한순간에 그녀의 숨통을 조여왔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마치 빛을 잃었던 필름 조각들이 갑자기 선명하게 재생되는 듯한 경험을 했다.
“기억이 사라져도… 존재는 남을 거야.”
속삭임. 부드러운 목소리. 누구의 목소리였을까? 분명 따뜻했지만, 동시에 깊은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 뒤편으로 차가운 금속성 소리가 들렸다. 거대한 기계가 움직이는 둔중한 진동. 손끝을 스치는 따뜻한 체온. 누군가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간절하게, 놓지 않으려는 듯이. 그러나 이내 그 손은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멀어져 갔다.
“이것만이…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그리고 강렬한 빛. 눈을 태울 듯한 백색 섬광 속에서 하나의 형체가 희미하게 보였다. 길고 긴 터널. 터널 끝에 서 있는 한 사람. 그 사람은… 그녀 자신이었다. 더 젊고, 더 결연한 표정을 한 하윤이 어떤 장치 앞에 서 있었다. 그녀의 눈은 눈물로 가득했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슬픔과 함께 찾아온 결단이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그때, 화면 속 문양이 흐려지면서 다른 이미지가 겹쳐졌다.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 아니, 그녀가 기억 속에서 본 바로 그 젊은 여인의 모습이었다. 젊은 하윤은 손에 든 작은 장치를 자신의 머리에 대고 있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을 포기하는 듯, 모든 것을 내려놓는 듯한 처연한 미소. 이어지는 것은 지독한 정적. 그리고 찰나의 순간, 그녀의 기억이 흩어지는 듯한 느낌이 온몸을 관통했다. 마치 유리컵이 산산조각 나는 듯, 모든 연결이 끊어지는 듯한 아득한 감각.
“하윤아! 괜찮아?”
지혁의 다급한 목소리가 그녀를 현실로 잡아끌었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있었다. 머리를 감싸 쥐고, 터져 나오는 울음을 억누르려 애썼다. 찢어지는 듯한 심장의 고통과, 동시에 밀려드는 깊은 슬픔이 그녀를 집어삼켰다. 파편 같았던 기억들이 불완전하게나마 하나의 선을 이루었다. 그녀는 기억을 잃은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선택했던 것이다. 자신의 기억을 봉인하는 것을.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혹은 견뎌내기 위해. 그리고 그 기억의 중심에는, 지울 수 없는 고통과 함께 한 사람이 있었다.
그때, 화면 속 문양이 다시 선명해지며, 낯선 경고문이 붉은색으로 번쩍였다. [시공간 교란 감지. 추적자 활성화. 좌표 확인 중.]
지혁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추적자라니? 이게 무슨 소리야?”
하윤은 흐려진 시야로 화면을 응시했다. 젊은 하윤의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듯했다. 자신이 선택한 기억 상실. 그리고 그 봉인된 기억 속에 숨겨진 진실이, 이제 그녀를 따라잡고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잊음으로써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려 했지만, 이제 그 ‘무언가’가 그녀의 그림자를 밟고 있었다.
온몸의 세포들이 비상벨을 울렸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과거가, 사실은 그녀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임무였고, 그 임무의 실패가 이제 현실이 되어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지혁의 팔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그녀의 숨결은 뜨거웠다. 고통과 공포, 그리고 알 수 없는 희망이 뒤섞인 채 그녀의 존재를 뒤흔들었다.
“우린… 도망쳐야 해.”
그녀의 목소리는 갈라져 나왔지만, 그 어느 때보다 명료했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길 잃은 시간 여행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스스로의 과거를 지운 죄인이자, 이제는 그 과거와 다시 마주해야 할 운명에 처한 전사였다. 시간의 문이 다시 열리고 있었다. 이제는 도망칠 수 없는, 피할 수 없는 싸움의 시작을 알리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