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첫사랑을 찾는 탐정 – 제86화

잊혀진 온기 속에서

고요한 새벽이었다. 지훈은 손안의 오래된 사진을 응시했다. 빛바랜 흑백 사진 속에는 어린 은서가 낯선 아이들과 함께 서 있었다. 그 배경은 분명, 그가 수없이 밤을 지새우며 자료를 뒤져 찾아낸,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희망의 집’이라는 보육원이었다. 은서가 잠깐 머물렀다는 그곳의 기록은 참으로 희미했으나, 한 가지 이름만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당시 그곳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했던 박수진. 그리고 이제, 그녀를 만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오랜 추적 끝에 찾아낸 박수진은 도시의 번잡함과는 동떨어진,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작은 한옥집을 지키고 있었다. 굽이굽이 이어진 길을 따라 차를 몰아 도착한 그곳은, 시간을 잊은 듯 평화로웠다. 아침 햇살이 마당 가득 내려앉아 따스한 기운을 드리우고 있었다. 지훈은 차에서 내려 심호흡을 했다. 수십 년간 잊혀졌을지도 모를 한 인물의 기억 속에서, 은서의 흔적을 찾아야 했다. 그의 심장은 마치 첫 의뢰를 맡은 신인 탐정처럼 불안하게 요동쳤다.

대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백발이 성성한 노파 한 분이 문을 열었다. 온화한 인상이었으나, 눈빛에는 세월의 깊이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박수진 여사님이십니까? 서울에서 온 지훈이라고 합니다. 실례지만, 잠시 이야기 나눌 시간이 되시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그는 최대한 정중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노파는 잠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마치 그의 영혼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찾아오셨는지요. 서울에서 여기까지 올 정도면, 사연이 깊을 텐데.”

박수진 여사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단호함이 깃들어 있었다. 지훈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명함을 내밀었다. ‘지훈 탐정 사무소.’

“오래전 ‘희망의 집’에 계셨던 은서라는 아이를 찾고 있습니다. 그때 여사님께서 그 아이를 담당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은서의 이름이 언급되자, 박수진 여사의 표정에 미묘한 변화가 스쳤다. 마치 오래전 닫아두었던 서랍을 조심스럽게 여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이내 안으로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회색빛 기억의 조각들

따뜻한 차 한 잔이 놓인 마루에 마주 앉았다. 한옥의 고즈넉한 분위기 속에 창밖으로 보이는 푸른 숲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지만, 지훈의 내면은 여전히 격렬한 파도에 휩싸여 있었다.

“은서라…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네요. 그 아이가 벌써 그렇게 되었을까.”

박수진 여사는 창밖을 응시하며 아련한 미소를 지었다.

“은서는… 참 특별한 아이였어요. 어른스러운 면이 있었지만, 동시에 세상 모든 것이 두려운 작은 새 같았죠. 부모님을 잃고 이곳에 왔을 때,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있었어요. 제가 아무리 다가가려 해도 쉽게 마음을 열지 않더군요.”

지훈은 숨죽여 그녀의 말에 귀 기울였다. 그가 기억하는 은서는 언제나 밝고 명랑한 아이였다. 그의 품에 안겨 환하게 웃던 모습이 전부였다. 보육원에서의 은서는 그에게 낯선 모습이었다.

“하지만 딱 한 번, 은서가 제게 속마음을 털어놓은 적이 있어요. 비가 몹시 내리던 날이었죠. 아이들은 다 잠들었는데, 은서만 잠 못 들고 밖을 보고 있더군요. 다가가서 왜 그러냐 물었더니, 작은 목소리로 ‘보고 싶다’고 하더군요. 누가 보고 싶냐 물었더니… ‘오빠’라고 했습니다.”

‘오빠.’ 그 단어에 지훈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은서가 그곳에 있을 때도 자신을 그리워했구나. 그 아픔과 그리움이 십수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그에게 닿는 듯했다.

“그때 저는 그 오빠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어요. 그저 은서에게도 마음 기댈 곳이 있다는 생각에 안심했었죠. 하지만 그 이후로도 은서는 쉽게 웃지 않았어요. 늘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듯한 눈빛이었죠. 그때 은서가 가장 많이 이야기했던 것이 있었는데….”

박수진 여사는 말을 잇지 못하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지훈은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그녀의 기억이 파편처럼 떠오르기를 바라면서.

“‘바다.’ 은서는 늘 바다 이야기를 했어요. 언젠가 바다에 가서 무엇을 할 거라고. 분명히… 누군가를 찾아 바다로 갈 거라고 말했었죠. 저는 그게 단순히 아이의 꿈이라 생각했어요. 언젠가 좋은 가족에게 입양되면 자유롭게 바다를 보러 갈 수 있을 거라고.”

바다. 지훈의 머릿속에 수많은 바다의 이미지가 스쳐 지나갔다. 동해, 서해, 남해. 그녀가 말하는 바다는 어떤 바다였을까.

파도의 끝, 새로운 실마리

“은서는 이곳에 온 지 1년 정도 되었을 때 입양 가정으로 가게 되었어요. 아주 좋은 분들이셨죠. 따뜻한 마음을 가진 부부였지만, 은서는… 마지막까지 왠지 모를 불안감을 안고 떠나는 것 같았어요. 마치 자신의 진짜 목적을 아직 이루지 못했다는 듯이.”

지훈은 박수진 여사에게 은서를 입양했던 가족의 정보를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개인 정보라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게다가 워낙 오래된 일이라, 기록도 많이 소실되었을 거예요. 제가 기억하는 것은, 그 부부가 아이를 몹시 아꼈다는 것뿐입니다. 서울 외곽에 사셨던 걸로 기억해요. 작은 가게를 운영하셨던 것 같은데…”

실망감이 밀려왔지만, 지훈은 이내 정신을 차렸다. 바다. 그리고 ‘오빠’. 어쩌면 은서는 입양 이후에도 그의 뒤를 쫓으려 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 바다라는 곳이 그들의 추억과 연결된 중요한 장소였을지도 모른다.

“혹시, 은서가 떠나기 전에 특별히 남긴 것이나, 누군가에게 주려고 했던 것이 있었나요?”

지훈의 질문에 박수진 여사는 다시금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그녀의 얼굴에 미미한 깨달음의 빛이 스쳤다.

“아, 맞다. 하나 있었어요. 입양되기 며칠 전이었을 거예요. 은서가 제게 이걸 건네주면서 꼭… ‘바다에 두고 오라’고 부탁했어요. 아니, 두고 오라는 건 아니고… ‘바다에 갈 때 이걸 가지고 가라’고 했죠. 아마 자기가 떠난 뒤에라도 제가 바다에 가게 되면, 자기를 대신해서 이걸 바다에 전해달라는 의미였을 겁니다.”

박수진 여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벽장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오래된 나무 상자를 꺼냈다. 상자를 열자, 낡은 천 조각에 싸인 작은 조약돌 하나가 나왔다.

“이게 전부예요. 은서는 이걸 보면서… 자기가 가장 행복했던 날, 바닷가에서 오빠와 함께 주웠다고 했어요.”

지훈은 떨리는 손으로 조약돌을 받아 들었다. 매끄럽고 둥근 조약돌. 다른 조약돌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돌이었지만, 그의 손안에서 그 어떤 보석보다 빛났다. 어린 은서가 가장 행복했던 날, 자신과 함께 주운 돌. 그리고 그 바다.

조약돌은 그의 손 안에서 따뜻한 온기를 내뿜는 듯했다. 그것은 은서가 그에게 전하고 싶었던 마지막 메시지이자, 그녀의 행방을 좇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단서였다. 바다. 대체 어느 바다일까. 그리고 그 조약돌은 어떤 바다에서 주운 것이었을까. 그의 기억 속에는 어렴풋이 어린 은서와 자신이 함께 바닷가 모래밭을 뛰놀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오랜 시간 잊고 있던 그날의 기억, 파도 소리, 모래의 감촉, 그리고 은서의 환한 웃음소리가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 지훈은 조약돌을 꽉 쥐었다. 이제 그는 다시 바다로 향해야 했다. 은서가 남긴 마지막 흔적, 그 조약돌이 가리키는 파도의 끝에, 그녀가 서 있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