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훈은 낡고 비좁은 골목길 어귀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의 눈앞에는 허름한 간판이 보였다. ‘오래된 물감 향기 공방’. 지난밤, 희미한 기억의 조각들을 더듬어 찾아낸 한 단서가 그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서연이 젊은 시절 한때 그림을 배웠던 작은 화실. 어쩌면 그곳에 그녀의 흔적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한 줄기 희망이 그를 지탱하고 있었다.
차 문을 열고 내리자, 눅진한 공기 속에 희미하게 물감과 붓털, 그리고 낡은 나무 냄새가 섞여 들어왔다.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지난 수십 개의 밤을 잠 못 이루며 헤매던 그의 여정이, 어쩌면 이곳에서 하나의 매듭을 찾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문을 열자, 낡은 종이 벨이 쨍그랑 울렸다. 공방 안은 생각보다 어두웠고, 온갖 종류의 캔버스와 스케치북, 물감 통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햇살은 창을 통해 먼지 입자 사이로 길게 쏟아져 내리며 고요한 풍경을 만들었다. 안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잠시 후, 예순 후반쯤 되어 보이는 한 여인이 작업복 차림으로 나타났다. 차분하고 깊이 있는 눈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백발이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공방의 주인, 정윤희 여사였다.
“어서 오세요. 어떤 일로 오셨나요?” 그녀의 목소리는 잔잔했지만, 그 안에 오랜 세월을 견뎌낸 단단함이 느껴졌다.
지훈은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혹시 이 공방에서 서연이라는 이름의 여성을 아시는지 해서요.” 그는 떨리는 손으로 지갑에서 낡은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십 대 후반의 서연이 해맑게 웃고 있는 빛바랜 사진이었다.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나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정 여사는 사진을 받아들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한 기색이 스쳤다. “서연이라… 꽤 오래전 이름이군요. 많은 학생이 거쳐 갔으니 쉬이 기억나지는 않네요.” 그녀는 사진 속 서연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이 얼굴은 낯선데, 어딘가 익숙한 그림체가 떠오르는군요.”
지훈은 설명을 덧붙였다. “서연은 늘 그림 안에 특유의 별자리를 숨겨 넣었어요. 특히 그 푸른색을 유난히 좋아해서, 자신만의 남다른 색을 만들어 쓰곤 했습니다. 아주 깊고 투명한 사파이어 같은 파란색이었죠.”
그 순간, 정 여사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사진을 돌려주며 말했다. “아. 그 사파이어색. 그리고 그림 안에 숨겨 넣던 별자리. ‘은서’라는 이름을 쓰던 한 아이가 있었어요. 이곳에서 그림을 배우던 기간은 길지 않았지만, 그 특별한 푸른색을 참 잘 사용했었죠. 그리고 그림을 그릴 때마다 마치 비밀을 숨기듯, 작은 상징들을 넣어두곤 했어요.”
은서. 새로운 이름. 지훈의 심장이 다시 한번 크게 울렸다. 서연일까? 아니면 또 다른 함정일까. 하지만 그가 묘사한 ‘사파이어색’과 ‘별자리’는 오직 서연만이 지니고 있던 특징이었다. 그의 손이 저절로 주먹을 쥐었다. “은서 씨… 그 아이가 서연일지도 모릅니다. 언제쯤 이곳에 왔었나요?”
정 여사는 기억을 더듬는 듯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몇 년 전이었어요. 잠시 들렀다가 그림을 그렸고, 최근까지도 간간이 이곳을 찾아와 그림을 그리곤 했죠. 은서 씨는 세상의 시선에서 벗어나 조용히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는 것 같았어요. 마지막으로 이곳을 떠날 때, ‘더 이상 도망치지 않겠다’고 말했던 것이 기억나는군요.”
“그럼 은서 씨가 그린 그림이 이곳에 남아있나요?” 지훈의 목소리가 간절함으로 떨렸다.
정 여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떠나면서 급하게 챙기지 못한 것들이 몇 가지 있었어요. 그중 하나가 바로 은서 씨의 스케치북이었죠. 어쩌면 그 안에 당신이 찾는 서연의 흔적이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녀는 공방 안쪽, 오래된 캔버스들이 쌓여 있는 창고 같은 공간으로 지훈을 안내했다.
먼지 쌓인 선반 구석에서 정 여사가 작은 가죽 스케치북 하나를 꺼냈다. 손때 묻은 표지에는 ‘Eunseo’라는 필기체가 희미하게 쓰여 있었다. 지훈의 손이 스케치북을 향해 뻗어갔다. 그의 손끝이 닿는 순간, 묘한 전율이 흘렀다. 몇 번이고 심호흡을 한 그는 조심스럽게 스케치북을 펼쳤다.
첫 몇 장은 추상적인 풍경화와 인물 스케치였다. 섬세한 터치와 깊이 있는 시선은 분명 익숙했지만, 서연의 그림과는 미묘하게 달랐다. 아마도 세월이 그녀를 변화시킨 것이리라. 다음 장을 넘기는 순간, 지훈의 눈에 익숙한 풍경이 들어왔다. 그들만이 알던 오래된 느티나무, 그 아래 흐르던 작은 개울, 그리고 그 옆에 놓여 있던 낡은 벤치. 그의 숨이 턱 막혔다. 그리고 그 그림 속 하늘에, 서연이 그토록 사랑했던 사파이어색으로 그려진 작은 별자리가 숨어 있었다. 그들이 처음 만났던 날 밤, 함께 바라보았던 그 별자리였다.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이것은 서연이었다. 분명 그녀였다. 그림 옆에는 희미하게 날짜가 적혀 있었다. 불과 몇 달 전의 날짜였다. 그녀는 살아있었고, 이곳에 있었으며, 여전히 그들의 추억을 그림 속에 담아내고 있었다. 지훈의 눈가에 뜨거운 것이 고였다. 그는 주체할 수 없이 흐느꼈다.
“이 그림은… 이 그림은 그녀가 틀림없어요.”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손가락으로 그림 속 별자리를 어루만졌다. 오랜 세월 동안 그의 가슴에 맺혀 있던 응어리가 조금씩 풀려나가는 듯했다.
스케치북의 마지막 장을 넘기자, 작은 쪽지 하나가 보였다. 낡고 얇은 종이에 서연의 필체로 보이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작고 보라색 야생 제비꽃 한 송이가 조심스럽게 테이프로 붙어 있었다.
별빛 아래 숨겨진 길을 따라
아픔은 숲속에서 쉬어가리
파도 소리 닿는 먼 섬 끝에서
나는 다시, 빛을 찾으리.
시 아래에는 짧은 한 줄의 문장이 더 적혀 있었다. “지난날을 치유하는 섬, 제주도. 그곳에서 새로운 시작을 꿈꾸며.”
지훈의 손이 덜덜 떨렸다. 제주도. 정 여사의 말이 떠올랐다. 그녀가 ‘치유의 숲’ 같은 곳으로 갔다고 했던가. 그는 정 여사를 올려다보았다.
“은서 씨가 떠날 때, 정확히 어디로 갔는지 기억하시나요?”
정 여사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정확한 주소는 아니지만, 은서 씨가 ‘제주도의 작은 미술 치유 센터 같은 곳’으로 간다고 했었던 기억이 나는군요. 더 이상 도망치지 않고, 자신을 마주하기 위해 떠난다고 했어요. 힘든 시간을 보낸 것 같아 안타까웠습니다.”
지훈은 스케치북과 쪽지를 품에 안았다. 드디어, 드디어 그녀의 발자취를 따라잡았다. 새로운 이름, 새로운 시작, 그리고 ‘치유’라는 단어에 담긴 그녀의 아픔까지. 희망과 동시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그녀는 지난 시간 동안 무엇을 겪어왔을까? 왜 자신의 이름까지 바꾸고 숨어 지내야 했을까?
그는 다시 한번 스케치북을 펼쳐 마지막 장의 그림을 보았다. 스케치북 가장 뒷면, 작은 자기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서연의 얼굴이었다. 아름답지만, 깊은 슬픔이 서린 눈빛. 그 눈빛은 지훈의 심장을 저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그는 그녀를 찾아야 했다. 그녀의 아픔을 보듬고, 잃어버린 시간의 조각들을 다시 맞춰야 했다. 제주도. 그곳에 서연이 있었다. 그곳에서, 그들의 잃어버린 첫사랑이 새로운 페이지를 펼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훈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헤매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있는 곳으로, 오직 그 길만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그의 발걸음은 이미 제주도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