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언제나 설렘과 아련함을 동시에 안겨주는 계절이었다. 서연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겨울의 앙칼진 바람이 물러가고 여린 햇살이 대지를 간지럽히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가슴 한구편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기다림이 있었다. 올해로 벌써 일곱 번째 봄이었다.
그녀는 고즈넉한 한옥 마루에 앉아 연못가에 피어나는 수선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연분홍 진달래는 이제 막 봉오리를 터뜨릴 참이었고, 가지마다 초록 싹을 틔운 버드나무는 봄바람에 실려 온 물내음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붓을 든 채 화선지 위를 응시하던 서연의 손은 미동도 없었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그녀의 삶이었고, 지훈이 떠난 후의 시간을 견디게 해준 유일한 위안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도무지 붓이 나아가질 않았다.
봄볕 아래의 그림자
“아가씨, 차 드세요.”
묵묵히 그녀의 곁을 지켜온 순임 아낙이 따뜻한 매화차를 내밀었다. 향긋한 꽃내음이 코끝을 스쳤지만, 서연은 희미하게 웃을 뿐 잔을 들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연못 너머의 길게 뻗은 돌담에 머물러 있었다. 왠지 모를 불안감과 기대감이 뒤섞인 감정이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다.
“오늘따라 왠지 뒤숭숭하시네요. 좋은 소식이라도 오려나.” 순임 아낙이 덕담처럼 말했다.
좋은 소식이라…. 서연은 속으로 되뇌었다. 그녀가 기다리는 소식은 오직 하나였다. 7년 전,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훈의 행방. 모두가 그가 죽었으리라 단정했고, 그녀에게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서연은 포기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지훈이 언젠가 돌아오리라는 실낱같은 믿음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 믿음이 그녀를 이 외딴 한옥에서 홀로 살게 했고, 매일 아침 그의 그림을 그리게 했다.
오후가 되자 봄볕은 더욱 따사로워졌다. 서연은 붓을 내려놓고 정원 한 바퀴를 거닐었다. 새로 돋아나는 쑥과 냉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제비꽃들이 저마다의 생명력을 뽐내고 있었다. 그녀는 한참을 쪼그려 앉아 흙냄새를 맡았다. 그때였다. 정원 입구의 삐걱이는 문소리가 정적을 깼다.
“누구세요?”
순임 아낙이 마중 나갔지만, 이내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아가씨, 아무도 없는데… 문이 저절로 열렸어요.”
서연은 고개를 갸웃하며 정원 입구로 향했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그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낡은 나무 벤치 위에 작은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평범한 나무 상자였지만, 왠지 모르게 서연의 심장을 두드렸다.
오래된 나무 상자
서연은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집어 들었다. 가벼웠지만, 그 안에는 무게감 있는 무언가가 들어있는 듯했다. 겉면에는 아무런 글씨도, 주소도 적혀 있지 않았다. 누가 보낸 것일까? 불길한 예감과 함께, 알 수 없는 희망이 그녀의 가슴을 채웠다. 혹시…?
그녀는 상자를 들고 마루로 돌아왔다. 순임 아낙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연은 잠시 심호흡을 하고 조심스럽게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낡은 천 조각에 싸인 무언가가 들어 있었다. 천을 걷어내자,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닳아 해진 목각 인형 하나였다. 놀랍게도 그것은 지훈이 처음 만났던 날, 직접 깎아서 그녀에게 선물했던 작은 나무 인형이었다. 서연과 지훈,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투박하게 깎아낸 인형. 그녀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며 간직했던, 하지만 7년 전 지훈이 사라진 날 함께 사라져버린 그 인형이었다.
서연의 손에서 인형이 떨어져 마루 위로 굴렀다. 그녀의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솟아났다. 이 인형은 분명 지훈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인형은 그녀의 손에 다시 돌아왔다. 누가? 어떻게?
봄바람이 전해준 속삭임
서연은 인형을 다시 집어 들고 떨리는 손으로 만져보았다. 작은 인형의 어깨 부분에 아주 희미하게 새겨진 글자가 있었다. ‘영원’이라는 두 글자. 지훈이 자신들만의 비밀 표식으로 새겨 넣었던 글자였다. 누구도 알지 못하는, 오직 두 사람만이 아는 흔적.
이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지훈의 흔적을 가지고 와서 그녀에게 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흔적은 지훈이 살아있거나, 최소한 그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증거였다. 7년 만에 찾아온 가장 확실한 소식이었다.
서연은 상자 안을 다시 살펴보았다. 목각 인형 아래에 작은 엽서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낡은 종이였지만, 한 번도 사용되지 않은 깨끗한 엽서였다. 엽서의 앞면에는 흑백으로 인쇄된 오래된 다리 사진이 있었다. 그리고 뒷면에는 단 한 줄의 문장이 붓글씨로 쓰여 있었다.
“그때의 약속, 잊지 않았습니다.”
그때의 약속. 서연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 기억이 있었다. 처음 지훈과 만났던 날, 그들은 오래된 다리 위에서 영원히 함께할 것을 맹세했었다. 비록 흔한 맹세였지만, 두 사람에게는 그 무엇보다 소중한 약속이었다. 그리고 엽서에 쓰인 글씨체… 낯설지 않았다. 분명 지훈의 필체와는 달랐지만, 왠지 모르게 익숙했다.
서연은 엽서를 든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봄바람이 흔들리는 나뭇가지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귓가에 들려오는 바람 소리는 마치 희미한 속삭임 같았다. ‘움직여라, 찾아라.’
7년 동안 굳게 닫혀 있던 그녀의 마음이 활짝 열리는 듯했다. 더 이상 기다림에 갇혀 있을 수 없었다. 이 작은 목각 인형과 한 장의 엽서가 그녀의 삶에 거대한 파동을 일으켰다. 이것은 단순한 소식이 아니었다. 이것은 그녀의 멈춰 있던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할 신호였다.
“순임 아낙,” 서연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그 안에 전에 없던 단단함이 실려 있었다. “채비를 해야겠어요. 찾아야 할 곳이 생겼어요.”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몰랐다. 누가 보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직감했다. 이 작은 단서가 그녀를 지훈에게로 이끌어줄 것이라는 것을. 7년 만에 찾아온 봄바람은, 그녀에게 단순한 소식 이상의 것을 전해주었다. 그것은 꺼져가던 희망의 불씨를 다시 지피는 강력한 바람이었다. 그녀의 긴 여정이, 이제 막 다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