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파는 상점 – 제98화

고요했다. 수많은 꿈들이 잠들어 있는 이 공간은 언제나 쥐죽은 듯 고요했지만, 오늘 지아의 심장 소리는 그 정적을 깨뜨릴 듯 요란하게 울렸다. 낡은 상점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익숙한 종소리가 맑게 울리며 그녀의 방문을 알렸다. 오래된 종이와 희미한 인센스 향, 그리고 알 수 없는 이국의 꽃향기가 뒤섞인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지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녀는 이 순간을 위해 너무나 오랜 시간을 헤매어 왔다.

잃어버린 약속의 조각

어둠이 내려앉은 상점 안, 유리 진열장 너머로 형형색색의 꿈 조각들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떤 것은 어린아이의 웃음처럼 투명하게 반짝였고, 어떤 것은 오래된 슬픔처럼 탁하고 깊은 색을 띠었다. 그 모든 것을 지나, 지아의 시선은 늘 그랬듯 상점 주인, 사장님에게로 향했다.

사장님은 짙은 남색 비단 한복을 입고, 늙었는지 젊었는지 가늠하기 어려운 얼굴로 카운터에 앉아 있었다. 그의 눈은 언제나 멀리 있는 꿈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듯 아득했지만, 오늘만큼은 지아를 똑바로 응시했다.

“오셨군요, 지아 씨.” 사장님의 목소리는 삐걱이는 낡은 나무 문소리 같으면서도, 동시에 오랜 시간 바다를 품어온 조개껍데기 속 깊은 울림 같았다.

“네, 사장님. 제가 찾는… 그 꿈 조각은요?” 지아의 목소리는 갈라져 나왔다. 수십 번, 수백 번 이 질문을 던져왔지만, 오늘만큼 떨린 적은 없었다. 그녀의 손바닥은 땀으로 축축했다.

사장님은 말이 없었다. 대신, 그의 길고 가는 손가락이 카운터 아래 서랍을 천천히 열었다. 서랍 속에서 뿜어져 나온 빛에 지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빛은 여태껏 보아왔던 어떤 꿈보다도 강렬하고 생생했다. 마치 살아있는 심장이 뛰는 듯, 붉고 푸른빛이 교차하며 찬란하게 빛나는 구슬이 서랍 속에서 서서히 떠올랐다.

“찾았습니다. 지아 씨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지훈이와의 마지막 약속.” 사장님의 말에 지아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녀는 구슬을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손끝에 닿으려는 찰나, 사장님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지불해야 할 대가

“서두르지 마십시오. 모든 꿈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 하물며 이렇게 완전하고 순수한 꿈 조각에는 더더욱 큰 대가가 필요합니다.”

지아는 숨을 삼켰다. “알고 있습니다. 무엇이든요. 제 전부를 걸고서라도, 그 약속을 다시 떠올리고 싶어요.” 그녀는 과거에 수많은 기억의 파편을 대가로 지불해왔다. 기분 좋은 순간의 기억, 보잘것없는 재능, 심지어는 몇몇 사람들의 얼굴조차 희미해졌다.

사장님은 구슬을 천천히 카운터 위에 내려놓았다. 구슬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맥동하고 있었다.

“이번 대가는 다릅니다. 지아 씨의 현재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것도 아주 소중한 현재를요.”

“현재요?” 지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습니다. 지아 씨는 늘 세상에 색을 입히는 꿈을 꾸어왔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다채로운 빛깔을 선물하고 싶다며 붓을 들었죠. 그 꿈, ‘세상을 위한 찬란한 색의 화가’가 되겠다는 그 꿈을 포기해야 합니다.”

지아의 몸이 굳어버렸다. ‘세상을 위한 찬란한 색의 화가’. 그것은 지훈이가 세상을 떠난 후, 절망 속에서 겨우 움켜쥔 그녀의 유일한 희망이자 삶의 이유였다. 지훈이가 좋아했던 색들을 모아 세상에 뿌리겠다는, 그에게 바치는 그녀만의 맹세였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만 그녀는 숨을 쉴 수 있었다.

“그… 그게 아니면 안 되나요?” 지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안 됩니다.” 사장님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이 꿈 조각은 지아 씨의 영혼 깊숙한 곳에 닿아 있습니다. 지아 씨의 삶을 지탱하는 현재의 가장 강력한 꿈과 맞바꾸어야만, 온전히 기억으로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다른 어떤 것도 이 구슬의 무게와 같지 않습니다.”

지아는 구슬과 자신의 손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한 손에는 어릴 적 지훈이와의 마지막 약속이, 다른 한 손에는 그녀의 삶 전체를 지탱하는 예술가의 꿈이 들려 있는 것만 같았다.

지훈이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누나, 누나는 나중에 멋진 화가가 될 거야! 세상에 없는 색깔을 잔뜩 만들어줘!”

그녀가 그토록 되찾고 싶어 했던 기억. 그 기억 없이는 그녀의 삶은 늘 어딘가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그 기억을 찾기 위해, 지금의 자신을 버려야 한다니.

상점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시간조차 숨죽이고 지아의 결정을 기다리는 듯했다. 지아는 눈을 감았다.

‘지훈아… 나는, 너를….’

결국,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얼룩진 눈빛 속에서 강렬한 의지가 빛났다.

“…알겠습니다. 저의 꿈, ‘세상을 위한 찬란한 색의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지불하겠습니다.”

되찾은 기억의 파노라마

사장님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구슬을 들어 지아의 심장 부근에 가져다 댔다. 구슬은 강렬한 빛을 뿜으며 지아의 몸 안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따뜻하면서도 서늘한 기운이 몸 전체로 퍼져나갔다. 동시에, 그녀의 머릿속에 억눌려 있던 기억의 문이 활짝 열리는 듯했다.

어린 지훈이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날은 유난히 하늘이 맑은 가을날이었다. 공원 한 켠,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서 지훈이와 지아는 나란히 앉아 있었다. 지훈이의 작은 손에는 나뭇가지가, 지아의 손에는 색연필이 들려 있었다. 지훈이는 맨땅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지아는 스케치북에 지훈이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누나, 내가 나중에 커서 달나라에 가면, 누나가 달에 그림을 그려줘!” 지훈이가 맑은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달에? 어떻게?” 어린 지아는 웃으며 물었다.

“음… 달에 사는 외계인들이 심심하지 않게, 예쁜 무지개도 그려주고, 우리 가족 얼굴도 그려주고! 그럼 달도 매일매일 재밌을 거야!”

“좋아! 약속할게! 누나가 나중에 커서 아주아주 멋진 화가가 되면, 지훈이가 달나라에 갈 때 꼭 따라가서 달에 예쁜 그림을 잔뜩 그려줄게!”

지아는 지훈이의 작은 손을 잡고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지훈이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

그 약속은, 지훈이가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의 일이었다.

기억이 선명하게 눈앞에 펼쳐지자, 지아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그녀는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지훈이가 자신에게 바랐던 건, 세상의 모든 색을 담아 달까지 아름답게 물들여줄 수 있는 화가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무의식중에 ‘세상을 위한 찬란한 색의 화가’라는 꿈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 그 꿈은 지훈이에게 바치는 맹세이자, 그와 연결된 마지막 끈이었다.

구슬은 완전히 지아의 몸속으로 사라졌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눈물로 흐렸지만, 그 속에는 오래된 미련과 새로운 이해가 함께 담겨 있었다.

새로운 여정의 시작

“이제 알겠습니까, 지아 씨?” 사장님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지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제야… 알겠습니다.”

“모든 기억은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 그리고 그 대가는 때로 상상 이상으로 무겁습니다. 이제 지아 씨의 붓은 더 이상 찬란한 색을 꿈꾸지 않겠지요.”

지아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붓을 쥐고 싶다는 열망, 세상에 색을 뿌리고 싶다는 뜨거운 염원이 신기루처럼 사라진 것을 느꼈다.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린 듯 공허했지만, 동시에 잃어버렸던 퍼즐 조각을 맞춘 듯한 먹먹한 충만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지아는 나지막이 말했다. “지훈이와의 약속을 되찾았으니까요. 더 이상 그 약속이 저를 헤매게 하지 않을 테니까요.”

사장님은 미미하게 미소 지었다. “이제 지아 씨의 꿈은 새로운 길을 찾을 것입니다. 잃어버린 꿈의 자리에 또 다른 씨앗이 싹틀 수도 있겠지요.”

지아는 상점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해는 이미 서쪽 하늘 너머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거리의 풍경은 예전과 다름없었지만, 지아의 눈에 비치는 세상은 완전히 다른 색채를 띠고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화가의 꿈을 꾸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지훈이와의 소중한 약속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달에 그림을 그리는 것. 그녀의 새로운 여정은 이제 시작되었다. 텅 빈 캔버스가 아닌, 텅 빈 마음속에 무엇을 채워갈지는 그녀 자신만이 알 터였다.

지아는 길을 걸었다. 그녀의 발걸음은 가벼웠지만, 어깨 위에는 잃어버린 꿈의 무게와 되찾은 기억의 무게가 공존하고 있었다. 꿈을 파는 상점의 희미한 종소리가 그녀의 뒤에서 다시 한번 울리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