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 제110화

밤이 깊어질수록 세상의 소음은 희미해지고, 작은 방 안에는 윤슬의 숨소리만이 아득하게 맴돌았다. 차가운 공기가 창문을 두드렸지만, 그녀는 미동도 없이 낡은 나무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캔버스 위에는 그 어떤 흔적도 남지 않은 흰색만이 가득했다. 붓은 파레트 위에서 말라붙은 물감과 함께 오랜 시간 침묵하고 있었다. 몇 주째였다. 그 어떤 색도, 그 어떤 선도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 깨우지 못했다.

윤슬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의 손은 습관처럼 책상 한켠에 놓인 낡은 라디오로 향했다. 다이얼을 천천히 돌리자, 찌직거리는 잡음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매일 밤, 그녀의 고요한 세계에 유일하게 허락된 침입자,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였다.

어둠 속의 목소리

“…별지기입니다. 이 밤, 어떤 별 아래에서 제 목소리를 듣고 계신가요. 도시의 불빛에 가려져 보이지 않더라도, 저 높은 곳에는 언제나 우리를 비추는 별들이 빛나고 있답니다. 오늘은 ‘마음에 새겨진 빛’이라는 주제로 여러분의 이야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어둠 속에서 길을 잃었을 때, 혹은 너무 지쳐서 주저앉고 싶을 때, 우리에게 작은 빛이 되어주었던 순간이나 사람이 있으신가요? 그 빛 덕분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기억을 나누고 싶습니다.”

DJ의 차분하면서도 따뜻한 목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윤슬은 눈을 감았다. 마음에 새겨진 빛이라… 그녀의 머릿속에는 왠지 모르게 아련한 푸른색이 떠올랐다. 그것은 깊은 바닷속을 헤엄치는 인어의 비늘 같기도 했고, 여름밤하늘에 펼쳐진 은하수 같기도 했다. 그 색깔의 중심에는 언제나 한 사람이 있었다.

DJ는 첫 번째 사연을 소개했다. 발신자는 ‘은하’라는 이름이었다. 은하는 어릴 적 소꿉친구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가난하고 외로웠던 어린 시절, 늘 낡은 옥상에 올라가 별을 보며 꿈을 키웠던 두 아이. 한 아이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다른 아이는 별을 연구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서로의 꿈을 응원하며 각자의 길을 걸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연락이 뜸해지고 이제는 아득한 기억 속에만 남아버린 친구에게 전하는 뒤늦은 후회와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윤슬은 라디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은하의 사연을 들으며, 저절로 자신의 유년 시절로 빨려 들어갔다. 그녀에게도 그런 친구가 있었다. 이름은 지호. 지호는 윤슬의 첫 번째 별이었다. 그들은 아파트 단지 뒤편, 아무도 모르는 작은 언덕에 올라가 밤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지호는 별자리 지도를 펼쳐놓고 신화 속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윤슬은 그의 옆에서 그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렸다.

“윤슬아, 너는 우주를 그리는 화가가 될 거야.”
“지호야, 너는 나중에 저 별들 속에서 나를 찾아줘.”

어린 시절의 약속은 맹세처럼 굳건했다. 그러나 세월은 무정하게도 두 어린아이의 맹세를 잊게 만들었다. 중학교에 진학하며 지호는 다른 도시로 이사를 갔고, 이메일과 편지로 이어지던 연락은 점점 뜸해지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다. 윤슬은 지호를 찾아보려 했지만, 막막한 정보의 바다 속에서 그는 찾을 수 없는 별이 되어버렸다. 어쩌면, 찾아 나설 용기가 부족했는지도 모른다.

마음에 새겨진 노래

은하의 사연이 끝나자, DJ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는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왔다. 윤슬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 노래. 그 노래였다. 지호와 윤슬, 단 둘만이 아는 비밀스러운 노래. 그 노래는 언제나 지호가 별을 가리키며 불러주던, 어설프지만 진심이 담긴 멜로디였다. 별을 향한 동경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설렘, 그리고 서로에 대한 약속이 담겨 있는 노래.

피아노 선율은 고요한 밤의 공기를 찢고 윤슬의 심장 속으로 파고들었다.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메말랐던 감정의 댐이 한순간에 터져 버린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상실감과 후회, 그리고 어쩌면 다시는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슬픔에 압도당했다. 왜 그때 더 노력하지 않았을까. 왜 더 용기를 내지 못했을까. 그 푸른색의 빛은 왜 희미해졌을까.

창밖은 완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윤슬은 흐릿한 시야 너머로 창문 밖 희미하게 빛나는 별 하나를 발견했다. 도시의 불빛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지만, 저 작은 빛은 여전히 그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마치 지호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마음속에 새겨진 그 푸른 빛처럼.

노래가 끝나고 DJ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각자의 마음에 빛을 품고 살아가는 존재들일 겁니다. 그 빛이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을 때도 있고, 때로는 먼지처럼 잊혀질 때도 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다시 우리를 비추는 등대가 되어주죠. 은하님의 사연처럼, 그리고 이 노래처럼, 우리는 언젠가 그 빛을 다시 찾아내고, 그 빛을 품었던 이들과 다시 연결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윤슬은 천천히 눈을 떴다. 젖어있던 눈가는 차갑게 식어 있었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작은 불씨 하나가 다시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오랜 시간 그녀의 캔버스를 지배했던 흰색은, 이제 더 이상 공허함의 색이 아니었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을 기다리는 깨끗한 바탕색이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디오는 여전히 잔잔한 음악을 들려주고 있었다. 망설임 없이 붓을 들고, 굳어버린 물감을 나이프로 긁어냈다. 파란색 물감을 짜내자, 캔버스 위에 익숙하면서도 잊혔던 색이 번져 나갔다. 윤슬은 그 밤, 다시 붓을 쥐었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는 그녀에게 잃어버린 별을 찾아 나설 용기를 선물한 것이다. 지호에게 닿지 못한 이야기, 그리고 캔버스 위에서 잠들어 있던 새로운 우주를 향한 첫 발걸음이었다.

내일 아침에는 어쩌면, 오래된 주소록을 뒤적여볼지도 모르겠다고, 윤슬은 생각했다. 아주 작은 빛이, 어두운 밤을 밝혔다. 그리고 그 빛은 그녀를 다시 움직이게 했다. 별들이 쏟아지는 밤, 그녀는 그렇게 새로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