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낡은 일기장 – 제42화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은 나의 무릎 위에 놓여 있었다. 찢어진 표지, 세월의 더께가 앉은 누런 종이, 그리고 희미해진 글씨들. 제41화의 마지막 문장이 아직도 내 심장을 짓누르는 듯했다. ‘그날 이후, 나의 세상은 검은 먹물처럼 번져버렸다.’ 그 문장 아래에는 더 이상 글이 없었다. 다음 장은 몇 페이지를 건너뛴 채, 흐릿하게 시작되고 있었다. 무엇이 할머니의 세상에 그토록 깊은 절망을 드리웠을까.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럽게 다음 장을 넘겼다.

장마가 시작되기 전, 후덥지근한 공기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창문 너머로 멀리서 들려오는 매미 소리가 이 침묵 속에서 유난히 크게 울렸다. 내 손가락이 떨렸다. 마치 오래된 비밀을 봉인한 자물쇠를 여는 듯한 긴장감이 나를 휘감았다. 드디어, 할머니의 오래된 슬픔의 원인이 밝혀질 참이었다.

그 여름의 맹세

할머니의 글씨는 이전보다 더 흐트러져 있었고, 몇 번이나 쓰다가 멈춘 흔적이 역력했다. 잉크 번짐과 물방울 자국이 눈에 띄었다. 아마도 글을 쓰면서 할머니는 수없이 눈물을 흘렸으리라. 그 먹물 자국이 마치 할머니의 피눈물처럼 느껴졌다.

***

“… 1950년 여름, 그날의 해는 유난히 뜨거웠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우리는 서로의 손을 놓지 못했다. 정후의 손은 거칠었지만, 그 어떤 비단보다 부드럽게 내 손을 감쌌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었으나, 나는 그 깊이에서 말 못 할 불안을 읽었다. 그는 곧 떠나야 했다. 피할 수 없는 소용돌이가 우리를 삼키려 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어, 순영아. 내가 가지 않으면, 더 큰 위험이 닥칠 거야. 너와 우리 가족까지도.”

정후는 내 뺨을 어루만졌다. 그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너무나도 뜨거워, 나는 감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의 말이 가슴을 꿰뚫는 비수 같았지만, 나는 그를 붙잡을 수 없었다. 나라가 둘로 쪼개지고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던 시절.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해, 때로는 가장 잔인한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기다려 줄게. 꼭 돌아와야 해.” 나는 겨우 목소리를 짜냈다. 목구멍이 타는 듯 아팠다.

정후는 말없이 나를 품에 안았다. 그의 심장 소리가 내 귀에 웅웅 울렸다. 그 어떤 말보다 뜨거운 고백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체온을 마지막으로 기억하려는 듯,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그 길목에는 붉은 해당화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우리를 위로하려는 듯, 혹은 이별을 예고하려는 듯.

그는 주머니에서 조그마한 나무 조각을 꺼냈다. 닳고 닳아 윤이 나는 작은 새 모양의 조각이었다. 어린 시절, 그가 직접 깎아 만들어 준 것이었다. ‘새처럼 자유롭게,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아.’ 늘 그렇게 말하던 그였다.

“이걸 가지고 있어. 내가 돌아올 때까지. 내가 돌아오면, 그때 다시 돌려줘.”

내 손에 쥐여준 나무 조각은 아직도 그의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꼭 움켜쥐었다. 그 온기마저 사라질까 봐 두려웠다. 그의 뒷모습은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배처럼 희미해졌다. 나는 그 자리에 한참을 서서 눈물을 흘렸다. 어쩌면, 그것이 마지막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온몸을 휘감았기 때문이었다.

며칠 후, 전해진 소식은 나의 모든 것을 산산조각 냈다. 그가 속한 부대가 전멸했다는 소식. 그리고 그의 이름이 희생자 명단에 있다는 소식. 믿을 수 없었다. 그는 분명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잔인했다. 그날 이후, 나의 세상은 정말 검은 먹물처럼 번져버렸다. 나는 매일 밤, 그의 이름만 부르며 잠이 들었다. 내 뱃속에 움튼 작은 생명을 알지 못한 채로.

***

숨겨진 희망의 조각

일기장을 읽어 내려가던 내 손이 멈췄다. ‘내 뱃속에 움튼 작은 생명을 알지 못한 채로.’ 이 문장이 나의 눈을 사로잡았다. 할머니는 정후와의 사이에 아이를 가졌던 것이다! 나의 할아버지는 다른 분이신데… 그렇다면, 이 아이는 어떻게 된 걸까? 아니, 나의 아버지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었나? 혼란스러움과 충격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내 눈은 다시 일기장으로 향했다. 할머니의 글은 한동안 끊겼다가, 또다시 희미한 글씨로 이어져 있었다.

***

“… 몇 달 후, 나는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후의 아이였다. 이 세상의 모든 희망이 사라진 줄 알았는데, 내 뱃속에 작은 씨앗이 자라고 있었다. 슬픔과 함께 찾아온 감격. 하지만 동시에 막막함과 두려움이 나를 덮쳤다. 이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까. 홀로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그 시대에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다.

가족들에게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모두가 힘든 시기였기에, 나 혼자 짐을 짊어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정후가 남겨준 나무 조각을 밤마다 만지며 다짐했다. 이 아이를 지키겠다고. 정후의 마지막 유산인 이 아이에게, 그의 희망을 전해주겠다고.

결국, 나는 아이를 낳았다. 아주 작고 소중한 생명이었다. 정후를 닮은 듯한 눈매가 내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나는 그 아이에게 ‘지훈’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지혜로울 ‘지(智)’에 훈훈할 ‘훈(薰)’. 아이가 세상을 따뜻하고 현명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나는 아이를 내 곁에 둘 수 없었다. 나의 부모님과 주변의 시선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무엇보다, 이 아이를 홀로 키우다가 나까지 위험에 빠지면, 아이마저 지킬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눈물을 머금고, 먼 친척에게 지훈이를 맡겼다. 그곳에서는 내가 친모라는 것을 숨기고, 그저 고모 정도로만 알려지도록 했다. 지훈이가 나중에 상처받을까 봐, 모든 것을 비밀로 했다. 그 아이를 찾아갈 때마다, 나는 먼발치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잘 자라나는 아이를 보며, 가슴 한구석이 찢어지는 듯 아팠지만, 그것이 아이를 위한 최선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리고 몇 년 후, 지금의 할아버지와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 나의 상처를 감싸 안아주고, 새로운 삶을 살아갈 용기를 주신 분이었다. 하지만 내 마음속 한켠에는, 늘 지훈이와 정후가 자리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또 다른 아들이 있었다. 바로 나의 친아들, 지훈이….”

***

미처 몰랐던 진실의 무게

나는 일기장을 놓쳤다. 일기장은 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머리가 멍해졌다. 할머니가 숨겨왔던 진실의 조각들이 퍼즐처럼 맞춰지는 순간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할머니의 두 번째 아들이셨다. 그럼… 할머니에게는 또 다른 아들이 있었던 것이다. ‘지훈’이라는 이름의….

나는 주저앉았다. 오랫동안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을 읽으며 수많은 이야기를 접했지만, 이토록 충격적인 진실은 처음이었다. 할머니는 평생을 가슴에 묻고 살았던 것이다.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 그리고 그 이가 남긴 아이를 떠나보내야 했던 고통.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매번 할머니의 눈빛에서 읽었던 그 깊은 슬픔의 근원이 바로 이것이었단 말인가.

내 머릿속에는 수많은 질문이 떠올랐다. ‘지훈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할머니는 지훈이를 다시 만났을까?’, ‘나의 아버지는 이 사실을 알고 계셨을까?’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나는 무릎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흐느꼈다. 할머니의 고통이 마치 나의 고통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숨을 고르고, 나는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일기장을 주워 올렸다. 그 옛날, 정후가 할머니에게 주었다는 작은 나무 새 조각. 할머니는 그것을 어디에 두었을까? 어쩌면 평생을 간직하며 지훈이를, 그리고 정후를 그리워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려왔다.

나는 할머니의 유품이 담긴 작은 상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몇 년 전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내가 직접 정리했던 상자였다. 그 안에는 낡은 비녀, 빛바랜 사진첩, 그리고 몇몇 자잘한 장신구들이 들어있었다. 내 기억 속에는 나무로 된 그 어떤 조각도 없었다. 하지만, 혹시라도….

상자를 뒤적거리다, 낡은 천 주머니를 발견했다. 할머니가 늘 허리춤에 차고 다니시던 것이었다. 나는 천 주머니의 끈을 풀었다. 주머니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실망감에 한숨을 쉬려던 찰나, 주머니 안쪽의 꿰맨 부분에서 무언가 불룩한 것이 느껴졌다. 조심스럽게 실밥을 뜯어보니, 그 안에 작은 나무 조각 하나가 숨겨져 있었다. 조그마한 새 모양의 조각. 닳고 닳아 나무결이 매끈해진, 손바닥만 한 그것이었다.

내 눈에서 다시 뜨거운 눈물이 솟아올랐다. 할머니는 이것을 평생 몸에 지니고 다녔던 것이다. 정후와의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이 남긴 아픔과 희망을 모두 이 작은 나무 조각에 담아낸 듯했다. 나무 새 조각은 마치 할머니의 못다 한 이야기를 나에게 건네주는 듯했다.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 그것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었다. 한 여인의 치열했던 삶, 숨겨진 희생, 그리고 시대를 관통하는 사랑과 그리움의 증표였다. 나는 이제 이 나무 새 조각을 들고, 할머니의 또 다른 아들, 지훈이를 찾아야 한다는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할머니가 못다 이룬 이야기를, 내가 이어가야 할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