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하얀 침묵 속에서
창밖으로는 온종일 눈이 내렸다. 회색빛 하늘에서 쏟아지는 눈송이들은 금세 세상을 하얀 수묵화처럼 바꿔놓았다. 서연은 카페 창가에 앉아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머그컵을 감싸 쥐었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따스함과는 달리, 마음속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가는 듯했다.
테이블 위에는 한 장의 편지가 놓여 있었다. 며칠 전 도착한 해외 특파원 제의. 꿈에 그리던 기회였지만, 그녀의 시선은 자꾸만 창밖으로 향했다. 눈. 이 하얀 눈이 내리는 날이면 언제나 그랬듯, 오래전의 기억이 잉크처럼 번져나와 온 신경을 감쌌다.
‘그날도 이렇게 눈이 내렸지.’
아니, 그날은 오늘보다 더 맹렬하고 순수한 눈이 흩날렸다. 아직 세상의 무게를 알지 못하던 열아홉의 서연과 지훈. 낡은 창고 처마 밑에서 추위에 덜덜 떨면서도 마냥 해맑게 웃던 그들의 얼굴이 생생했다.
“서연아, 약속해줘.”
지훈의 숨결이 하얀 김이 되어 허공으로 사라졌다. 붉어진 코끝과 달싹이는 입술 사이로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슨 약속?”
“나중에, 우리가 아주 멋진 어른이 되면… 지금처럼 눈이 펑펑 내리는 날, 꼭 여기서 다시 만나자. 그때도 지금처럼 이렇게 손을 잡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우리가 되자.”
지훈은 작은 손을 내밀어 서연의 손을 꽉 잡았다. 차가운 손과 손이 맞닿아 온기가 스며드는 그 순간, 새하얀 눈송이 하나가 그들의 깍지 낀 손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녹아버리는 순간까지, 그 반짝이는 찰나가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았다.
서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너무나도 아득한 과거였다. 그 약속 이후로 지훈은 사라졌고, 그녀는 혼자 남아 무수한 겨울을 견뎌냈다. 강해져야 했고, 혼자 힘으로 세상과 맞서야 했다. 그렇게 독하게 버텨낸 결과, 지금 이 자리까지 온 것이었다. 이제 그녀 앞에는 새로운 길이 열려 있었다. 빛나는 미래, 아무도 방해할 수 없는 그녀만의 성공.
예기치 못한 재회
딩- 동.
카페 문이 열리고 차가운 겨울바람이 후 불어닥쳤다. 서연은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얼어붙은 듯 굳어버렸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남자.
짙은 코트 차림의 그는 눈발을 맞아서인지 머리카락에 하얀 눈송이가 앉아 있었다. 뚜렷한 이목구비와 예전보다 깊어진 눈빛. 세월의 흔적은 분명했지만, 서연의 눈은 단숨에 그를 알아보았다.
지훈.
그는 마치 과거의 약속이라도 기억하고 찾아온 것처럼, 서연의 테이블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서연은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머릿속은 새하얗게 비워졌고, 손안의 머그컵은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
“서연아.”
낮고 굵어진 목소리. 그 목소리에는 서연이 기억하는 소년의 발랄함 대신, 오랜 시간의 고독과 그리움이 묻어 있었다.
서연은 애써 표정을 감췄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옛날의 그 여린 소녀가 아니었다.
“오랜만이네, 지훈아.”
건조하게 내뱉은 한마디. 그러나 그 말은 서연의 목구멍 안에서 수백 번의 회한과 질문으로 뭉쳐져 있었다.
지훈은 서연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테이블 위, 그녀가 읽고 있던 해외 특파원 제의 편지에 그의 시선이 잠시 머물렀다.
“잘 지냈어?”
“보는 대로. 너도.”
서연은 시선을 피했다. 이 재회는 우연이 아니었다. 분명 지훈은 그녀의 소식을 듣고 찾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왜? 이 중요한 순간에, 그녀의 눈앞에 다시 나타난 이유가 무엇일까.
“서연아, 그 약속… 기억하고 있어?” 지훈의 눈빛이 흔들렸다.
서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약속. 그 약속은 이제 그녀의 길을 가로막는 걸림돌 같았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누군가의 약속에 얽매일 수 없었다. 그녀에게는 그녀만의 세상이 있었다.
갈림길, 혹은 굴레
“그 약속, 아직 유효하다고 믿는 거야?” 서연의 목소리는 칼날 같았다.
지훈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는 씁쓸하게 웃었다. “너는 아니었으면 하는 눈치네.”
“세상은 변했고, 나도 변했어. 너는 그동안 어디에 있었어? 그 약속이라는 걸 가슴에 품고 살아온 건 나 혼자였어. 너는 없었잖아.”
서연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그 안에는 억눌린 분노와 서러움이 가득했다. 그녀가 얼마나 많은 밤을 그 약속을 원망하며 지새웠는지, 지훈은 알 리 없었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면 될 줄 알았어? 이제 와서 나타나서 뭘 어쩌자는 건데?”
지훈은 서연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눈 속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슬픔과 회한이 함께 담겨 있었다.
“네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거야. 하지만 서연아, 나는 단 한 순간도 그 약속을 잊은 적 없어.”
“잊지 않았다니. 그럼 그동안 왜 연락 한 번 없었어? 왜 내 앞에서 사라졌냐고!”
서연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카페 안의 다른 손님들이 일제히 그들을 돌아봤지만, 서연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지훈에게 쏟아지는 감정의 파도는 그녀를 집어삼킬 듯 맹렬했다.
지훈은 천천히 가방에서 낡은 수첩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서연에게 내밀었다.
“나는… 너를 지켜보고 있었어. 네가 얼마나 멋진 사람이 되었는지, 얼마나 단단해졌는지. 그리고 이제, 네가 꿈에 그리던 기회를 잡았다는 것도 알고 있어.”
서연은 수첩을 받아들었다. 표지는 닳아 해졌지만, 안에는 익숙한 글씨들이 가득했다. 오래전 그들이 함께 꾸던 꿈들, 서로에게 해주던 약속들, 그리고 서연이 좋아하던 시의 구절들. 수첩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눈이 펑펑 내리던 그날의 풍경이 연필 스케치로 정교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언젠가, 반드시. 너와 함께.’
서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그제야 지훈의 눈에서 읽을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의 층들을 발견했다. 단순한 그리움이나 후회가 아니었다. 마치 깊은 바닷속에 가라앉은 비밀처럼, 알 수 없는 무게가 지훈을 짓누르고 있는 듯했다.
“나는 네가 그 기회를 잡았으면 좋겠어.” 지훈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단호했다. “네가 꿈꾸던 세상으로 나아가야 해. 나는 이제야, 네 앞에 나타날 자격이 생겼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자격? 그게 무슨 말인데?”
지훈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눈은 내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어둠이 드리워졌다.
“네가 알면 안 되는 일들이 있었어. 그리고 지금도… 완벽하게 해결된 건 아니야.”
서연은 혼란스러웠다. 오랜 시간 그녀를 괴롭혔던 존재였던 지훈이, 이제 와서 그녀의 꿈을 응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그녀가 알 수 없는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나는… 떠나야 해.” 지훈은 다시 서연을 보았다. 그의 눈빛은 고통스러웠지만, 흔들림이 없었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곧 다시 사라져야 할 거야.”
서연의 손에서 수첩이 떨어졌다. 낡은 종이 뭉치가 테이블 위로 툭 떨어지는 소리가 고요한 카페 안에 메아리쳤다.
“그럼 왜… 왜 다시 나타난 거야?”
지훈은 천천히 몸을 숙여 떨어진 수첩을 주워 서연에게 건넸다. 그의 손끝이 서연의 손에 스치는 순간, 차가운 전율이 흘렀다.
“네가 그 약속 때문에 망설이고 있을까 봐. 내가 널 방해하는 굴레가 될까 봐… 그게 싫어서.”
지훈의 말은 비수처럼 서연의 심장을 찔렀다. 그녀는 그 약속을 잊으려 애썼고, 때로는 원망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늘 그 약속에 갇혀 있었다. 그리고 지훈은 그 사실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창밖의 눈은 더욱 거세게 내리기 시작했다. 하얀 눈꽃은 세상을 뒤덮고, 서연의 마음속 약속의 자리를 지우려 애쓰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눈이 아무리 많이 내려도, 그 약속은, 그와의 기억은,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날의 약속은 과연 그녀에게 자유를 주는 굴레일까, 아니면 그녀를 얽매는 운명일까. 서연은 눈물을 머금은 채, 지훈의 그림자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