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소라의 손끝이 창백하게 질린 창밖의 풍경을 더듬었다. 병원 창문 너머로 회색빛 하늘이 낮게 드리워져 있었고, 그 아래로 조용히, 그러나 쉼 없이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마음속에서 하염없이 쏟아져 내리는 절망처럼. 손에 쥐고 있던 검사 결과지를 든 채, 그녀는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의사의 침착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생각보다 진행이 빠릅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습니다.”
그 말이 칼날처럼 심장을 파고들었다. 눈송이가 창문에 부딪혀 스르륵 녹아내리듯, 그녀의 모든 희망도 그렇게 스러지는 것 같았다. 작은 몸을 가진 여린 아이, 민아. 이제 겨우 일곱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에게는 감당하기 버거운 운명이었다. 소라는 흐릿해지는 시야 속에서 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창백한 얼굴, 생기 잃은 눈동자. 자신이 이렇게 변해버린 줄도 몰랐다. 민아가 아프기 시작한 그날부터, 그녀의 세상은 서서히 겨울로 변해갔다.
문득, 잊으려 애썼던 오래전의 한 겨울 날이 떠올랐다. 새하얀 눈이 세상의 모든 소음을 집어삼키고 온 세상을 깨끗하게 덮었던 날. 준과 그녀는 갓 피어난 사랑의 맹세처럼 반짝이는 눈꽃 아래서 서로의 손을 잡고 약속했었다. “우리 아이에게는 따뜻한 봄날 같은 행복만 가득하게 해줄 거야.” “그래, 무슨 일이 있어도 너와 우리 아이를 지킬게.” 그 약속은 마치 영원할 것만 같았다. 그 약속 위에 민아가 피어났고, 그 약속은 두 사람의 전부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 그 약속은 눈 녹듯 사라져버릴 위기에 처해 있었다. 민아의 병은 예상보다 훨씬 깊었고, 치료는 고통스러웠으며, 성공률은 희박했다. 소라는 차마 준에게 이 모든 것을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의 눈빛 속에 번지는 절망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 혼자 모든 것을 짊어지고 싶었다. 마치 얼음장처럼 차가운 이 고통 속에서, 홀로 견뎌내고 싶었다.
“소라야.”
익숙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돌아보지 않아도 준임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온기만으로도 등 뒤가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자신을 감싸는 그의 온기가 이내 차가운 현실에 얼어붙을까 봐 두려웠다.
“왜 여기 있어? 민아는?” 소라는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평온한 척했지만,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다.
준은 그녀에게 다가와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그의 눈빛은 걱정으로 가득했다. “민아는 잠들었어. 자기도 힘들 텐데, 널 보러 왔어.” 그의 시선은 소라의 손에 들린 서류로 향했다. “그건… 뭐야?”
소라는 순간 몸을 움츠렸다. 서류를 황급히 등 뒤로 숨기려 했지만, 이미 준의 눈은 그것을 보았다. 그의 얼굴에서 미세한 떨림이 스쳤다. “소라야, 무슨 일이야? 말해줘.”
그의 다정한 추궁에 소라의 눈가에 뜨거운 것이 차올랐다. 애써 참으려 했지만, 이미 무너진 마음의 둑은 작은 충격에도 터져버릴 듯했다. “준아… 나, 너무 무서워.” 그녀의 목소리는 끝내 흐느낌으로 변했다. 숨겨왔던 두려움과 절망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민아… 민아가 너무 아파.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치료가, 힘든데… 성공할 확률도 낮대.”
준의 얼굴에서 모든 핏기가 사라졌다. 그의 손은 무너져 내리는 듯한 힘으로 소라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소라야? 아닐 거야… 분명히 나아질 거라고 했잖아!” 그의 목소리가 절규에 가까워졌다. 눈물 한 방울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차가운 현실이 그의 심장에도 얼음 칼날을 박아 넣는 듯했다.
소라는 고개를 떨구었다. “의사 선생님이… 마지막 기회라고 하셨어. 새로운 치료법이 있긴 하지만, 아이가 감당하기엔 너무 가혹할 거래. 그래도… 시도해야 한대. 이걸 놓치면….”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놓치면 끝이다’라는 말이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침묵이 병원 복도를 짓눌렀다. 창밖의 눈은 더욱 거세졌다. 세상이 온통 하얀색으로 뒤덮여 가고 있었다. 그 하얀색은 순수함이 아니라,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절망의 색처럼 느껴졌다. 준은 소라를 끌어안았다. 그의 품은 여전히 따뜻했지만, 그 온기 속에서도 소라는 시린 바람이 스쳐 가는 것을 느꼈다. 두 사람의 어깨는 희미하게 떨렸다. 어린 딸을 지키겠다는 겨울 눈꽃 아래의 맹세가, 지금 이 순간, 너무나도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해, 준아? 우리가 뭘 해야 해…?” 소라의 목소리가 작은 새의 울음소리처럼 애처로웠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혼자서 이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녀는 준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창밖에는 차가운 눈꽃이 하염없이 내렸다. 그날의 약속은, 과연 이 모진 겨울을 버텨낼 수 있을까. 두 사람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서로의 온기에 기대어, 작은 떨림을 나누고 있을 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