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우는 낡은 서재의 퀴퀴한 냄새 속에서 숨을 골랐다.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없이 많은 문서와 사진, 그리고 이름들을 뒤적였다. 연희의 흔적을 찾아 헤맨 세월은 그의 어깨를 짓눌렀지만, 동시에 그의 심장을 뛰게 하는 유일한 이유였다. 이번만은 달랐다. 손에 쥐어진 낡은 명함 한 장이, 그의 긴 여정의 끝을 예고하는 듯했다.
명함에는 ‘강민호’라는 이름과 함께 몇 년 전 폐업한 디자인 스튜디오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지난밤, 그는 연희가 한때 머물렀던 작은 도시에서 그녀의 지인 중 한 명을 찾아냈고, 그 지인은 어렵게 이 강민호라는 남자의 이름을 내밀었다. 연희가 힘든 시기를 보낼 때, 곁에 있어 주었다는 유일한 인물이라고 했다.
현우는 차가운 손으로 카페의 온기가 가득한 머그컵을 감쌌다. 창밖으로는 늦은 가을비가 촉촉이 내리고 있었다. 약속 시간은 한참 지났지만, 강민호는 나타나지 않았다. 초조함이 그의 심장을 갉아먹었다. 혹시 또 헛된 희망이었을까? 그를 이끈 단서들이 늘 그랬듯, 이번에도 신기루처럼 사라질까 두려웠다.
그때,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섰다. 젖은 머리카락, 깊게 패인 미간 주름, 그리고 어딘가 지쳐 보이는 눈빛. 현우가 찾던 강민호였다. 그는 현우를 알아본 듯, 망설임 없이 현우의 테이블로 걸어왔다.
“김현우 씨, 맞죠?” 민호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그 목소리에는 어딘가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현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 강민호 씨.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민호는 현우를 훑어보았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이곳에 온 건, 당신이 서연희 씨를 찾는 탐정이라는 말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서연희 씨를 찾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현우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의 눈빛에는 지친 탐정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연희를 향한 갈망은 숨길 수 없었다.
민호는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한숨을 쉬었다. “연희는… 당신 같은 사람들에게서 숨어 살았어요. 당신은 대체 누굽니까?”
“저는… 그녀의 첫사랑입니다.” 현우는 어렵게 고백했다. 그 말은 차가운 카페 공기 속으로 녹아들었다.
민호는 콧방귀를 뀌었다. “첫사랑이라. 당신 같은 첫사랑이라면, 연희가 왜 그렇게 도망치고 싶어 했는지 알 것 같군요.”
현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무슨 말씀이신지… 제가 그녀에게 해를 끼친 적은 없습니다.”
“당신이 직접 해를 끼치지 않았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당신이 그녀를 쫓는다는 사실 자체가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녀의 과거의 그림자입니다.” 민호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눈빛에는 연희를 보호하려는 단단한 의지가 있었다.
현우는 아픔을 느꼈다. 자신이 연희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찾아왔는데, 그녀에게는 자신이 또 다른 위협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제발…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십시오. 제가 그녀를 만나서, 모든 오해를 풀고 싶습니다. 그녀에게 제가 얼마나 간절히 기다려왔는지 말하고 싶습니다.” 현우의 목소리는 절박했다.
민호는 한참을 침묵했다. 창밖 빗줄기는 점점 거세졌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연희는… 당신이 알던 그 모습이 아닙니다. 그녀는 이름도 바꿨고,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당신 때문에, 혹은 당신이 연루된 어떤 일 때문에, 그녀는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야 했습니다. 당신은 그녀의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 중 하나일 겁니다.”
“이름을… 바꿨다고요?” 현우는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에 연희의 밝은 웃음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그 웃음이, 이제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누군가의 것이란 말인가?
민호는 주저하는 듯 보였지만, 이내 결심한 듯 말을 이어갔다. “연희는… 재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재능 때문에 불행해졌죠. 몇 년 전, 어떤 거대한 세력이 그녀의 작품과 아이디어를 훔치려 했고, 그녀를 궁지로 몰아넣었습니다. 당신이 찾던 연희는, 그때 모든 것을 버리고 사라져야 했습니다. 저는 그때 그녀를 도왔고, 그녀가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작은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거대한 세력…?” 현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단순한 실종이 아니었던 것이다. “누굽니까? 그들이 아직도 그녀를 찾고 있습니까?”
민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이제 그녀를 찾지 못할 겁니다. 연희는 죽은 사람처럼 살았으니까요. 하지만… 그녀는 이제 겨우 안정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당신이 나타나면, 그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녀가 겨우 찾은 평화를 깨뜨릴 권리가 당신에게 있습니까?”
“평화를 깨뜨릴 권리라니… 저는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습니다. 저는 그녀를… 사랑합니다.” 현우는 민호의 말이 비수가 되어 가슴에 박히는 것을 느꼈다. 그동안의 모든 노력이 그녀에게는 고통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숨이 막혔다.
민호는 현우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녀는… 당신을 잊으려 노력했습니다. 그 시간들을 존중해주십시오.”
하지만 현우의 눈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갈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녀를 만나야 합니다.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그녀의 말로 듣고 싶습니다. 저를 그녀에게 데려가 주십시오.”
민호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정말 지독한 사람이군요. 당신에게 연희를 만나게 해주는 것이 옳은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지금 있는 곳에서, 당신과 비슷한 과거를 가진 남자를 기다린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쩌면 당신이… 그녀가 기다리던 사람일지도 모르겠군요.”
현우는 귀를 의심했다. “기다린다고요? 저를요?”
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아주 오랫동안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 그림을 완성하려면, 당신을 만나야 할 거라고 말했었죠. 저는 그것이 당신을 의미하는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녀는 당신에 대한 어떤 미련도 남아있지 않다고 말했지만… 그녀의 그림 속에는 늘 당신이 알던 연희의 그림자가 배회하고 있었습니다.”
현우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희망의 빛이 그의 오랜 절망을 뚫고 들어오는 듯했다. 그녀가 자신을 기다렸다고? 이 모든 시간 동안?
“어디에 있습니까? 연희가 어디에 있는지 제발 알려주십시오.” 현우의 목소리는 떨렸다.
민호는 지갑에서 작은 종이 한 장을 꺼내 현우에게 건넸다. 낡고 닳은 지도 조각이었다. 그곳에는 한적한 해변가 마을의 주소가 표시되어 있었다.
“이곳으로 가십시오. 하지만 경고합니다. 연희는 당신이 알던 소녀가 아닙니다. 그녀는 강해졌고, 또 아픔을 겪었습니다. 당신이 그녀에게 주었던 사랑만큼, 당신이 그녀에게 주었던 상처도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녀는 혼자가 아닙니다.”
현우의 손이 떨렸다. 지도를 받아 든 그의 눈빛은 빗속을 뚫고 저 멀리 수평선을 응시하는 듯했다. 그녀가 혼자가 아니라는 말에 잠시 혼란스러웠지만, 그보다 더 큰 기대와 두려움이 그의 가슴을 채웠다.
“고맙습니다, 강민호 씨. 정말 고맙습니다.” 현우는 민호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십수 년의 시간이 담긴 종이 한 장이었다. 이제, 모든 것의 끝이거나, 새로운 시작이거나. 그의 잃어버린 첫사랑을 향한 여정은 드디어 마지막 목적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는 비에 젖은 거리를 뛰쳐나갔다. 그의 심장은 마치 처음 연희를 만났던 열여덟 소년처럼 쿵쾅거렸다. 해변 마을. 그곳에 연희가 있었다. 어떤 모습으로,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제 그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그의 차 시동이 걸리고, 빗길을 가르며 어둠 속으로 질주했다. 연희에게로 향하는 길. 그것은 단순한 길이 아니라, 그가 잃어버렸던 자신을 찾아가는 길이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