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정적을 뚫고 희미하게 번지는 눈송이들이 창문을 두드렸다. 지우는 가느다란 어깨를 웅크린 채 병실 침대에 앉아 창밖을 응시했다. 밤새 내린 눈은 세상을 온통 순백으로 덮었고, 그 위로 아침 햇살이 부딪혀 반짝였다. 아름다웠지만, 지우의 마음에는 얼음장 같은 냉기가 돌았다. 오늘이 바로 그 날이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하는 날.
그녀의 손목에는 링거 바늘이 꽂혀 있었고, 가느다란 관을 타고 수액이 투명하게 떨어졌다. 며칠 전부터 시작된 현기증과 미열은 그녀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하지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몸의 아픔이 아니었다. 도윤에게서 멀어져야 한다는, 그 잔혹한 현실이 그녀의 심장을 찢는 듯했다.
문득, 5년 전 그 겨울밤이 떠올랐다.
“지우야, 어떤 눈꽃이 내려도, 어떤 계절이 와도, 우리 둘은 항상 함께하는 거야. 약속해.”
새하얀 눈송이가 펑펑 쏟아지던 골목길에서, 도윤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따뜻한 숨결을 불어넣어 주었었다. 그의 눈빛은 맹세처럼 단단했고, 그의 손은 어떤 추위도 녹일 듯 뜨거웠다. 그 약속은 지우의 삶을 지탱하는 유일한 등불이자, 가장 소중한 보물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약속은 그녀에게 족쇄가 되었다. 자신의 병이 깊어질수록, 그녀는 도윤의 삶에 드리워질 그늘을 상상했다. 빛나야 할 그의 미래를 자신이 망쳐서는 안 된다고 수없이 되뇌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를 밀어내기로 결심했다. 차갑게, 잔인하게, 그가 자신을 미워하게 만들어서라도.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우는 화들짝 놀라며 재빨리 눈물을 닦았다.
“지우 씨, 몸은 좀 어떠세요?”
병동 간호사의 목소리였다.
“아, 네… 괜찮아요.”
지우는 애써 미소 지었다. 간호사는 그녀의 혈압을 재고, 이것저것 기록한 뒤 돌아갔다. 병실은 다시 고요해졌다. 그녀는 주머니 속에서 작은 쪽지 하나를 꺼냈다. 어젯밤, 밤새 고민해서 쓴 이별 통보였다. 그를 만나면 흔들릴까 봐,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을 것 같아서 글로 적었다. 떨리는 손으로 구겨진 쪽지를 펴는 순간, 문이 갑자기 열렸다.
도윤이었다.
그의 눈은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듯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머리카락에는 아직 녹지 않은 눈송이가 몇 개 붙어 있었다. 그의 어깨에는 흰 눈이 쌓여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타오르는 불꽃처럼 뜨거웠다.
“지우야…”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지우는 놀라움과 함께 밀려드는 죄책감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어… 어떻게 여기에…”
그녀는 겨우 입을 열었다.
도윤은 묵묵히 병실 문을 닫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작은 종이가 들려 있었다. 지우가 밤늦게까지 정리했던 그의 서류 뭉치에서 우연히 발견한, 진료비 영수증이었다. 그 영수증에는 그녀의 이름과 함께 ‘정밀 검사 요망’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이게 뭐야, 지우야.”
그의 목소리는 낮게 깔렸지만, 그 속에는 폭풍 전야의 고통이 담겨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오해야.”
지우는 애써 외면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녀의 심장이 불안하게 쿵쾅거렸다. 이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오해? 네가 요즘 나를 피하고, 연락도 제대로 받지 않고, 나를 밀어내는 모든 이유가 이게 오해라고?”
도윤은 영수증을 침대맡 테이블에 놓았다.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네가 아픈 것 같다고, 자꾸 불안한 예감이 든다고… 그래도 네가 괜찮다고 하니까, 믿으려고 애썼어. 그런데 이게 뭐야, 지우야. 도대체 나한테 뭘 숨기고 있는 거야?”
지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절망과 상처가 그녀의 가슴을 후벼 팠다.
“말해줘. 부탁이야. 너 혼자 감당하려 하지 마. 우리가 함께하기로 했잖아.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 영원히 함께하자고 약속했잖아!”
도윤은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그의 눈가는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그의 눈물 앞에서 지우의 철옹성은 한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도윤아… 나는…”
그녀의 목소리는 울음 때문에 끊어졌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 순간이 오지 않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이별의 쪽지는 그녀의 손에서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도윤은 그녀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괜찮아, 지우야. 괜찮으니까. 다 말해줘. 네가 어떤 힘든 일을 겪고 있든, 내가 옆에 있을게. 혼자 두지 않아.”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단호했다. 그의 따뜻한 손길이 그녀의 얼어붙은 마음을 조금씩 녹이는 것 같았다.
지우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얼룩진 그녀의 얼굴에는 깊은 두려움과 함께, 한 줄기 희망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의 입술이 겨우 움직였다.
“나… 나한테… 병이 있어, 도윤아.”
그 고백은 찢어질 듯한 고통과 함께 그녀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병실 안의 공기는 순간 얼어붙는 듯했다. 창밖으로는 여전히 눈송이가 한두 개씩 흩날리고 있었다. 마치 그 날의 약속을 기억이라도 하듯이.
도윤의 얼굴에서 모든 표정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의 손은 여전히 지우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깊고 고요했다.
“어떤… 병인데?”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 조용해서,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지우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이제는 도망칠 수 없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말해야 했다.
차가운 겨울 공기 속에서, 그들의 약속은 혹독한 시험대에 올랐다. 그리고 그 시험의 결과는, 아직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지우의 심장은 격렬하게 요동쳤지만, 도윤의 눈빛 속에서 그녀는 아주 작은, 그러나 꺾이지 않는 희망의 불씨를 보았다. 그것은 어쩌면,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 맺었던 그 약속을 다시 한번 믿어보라는 침묵의 메시지인지도 몰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