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모퉁이 작은 빵집의 기적 – 제119화

늦가을의 부드러운 햇살

산모퉁이 작은 빵집에는 늦가을의 부드러운 햇살이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창밖의 단풍은 절정을 지나 스러져가는 중이었고, 바람은 이따금 잎새를 흩뿌리며 창문을 두드렸다. 빵집 안은 여느 때처럼 따뜻하고 고소한 냄새로 가득했다. 갓 구워져 나온 밤 식빵의 달큰한 향, 통밀 sourdough의 은은한 산미, 그리고 진한 커피의 아로마가 어우러져 방문객들을 포근하게 감쌌다.

제빵사 지훈은 오늘따라 유난히 고소하게 구워진 호밀빵을 정리하며 습관처럼 문밖을 내다봤다. 그의 아내 수아는 카운터에서 막 구운 애플파이를 포장하며 손님과 정다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평화로운 오후였지만, 지훈의 마음 한구석에는 며칠째 가라앉지 않는 작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익숙한 빈자리

그것은 바로 옥순 할머니의 빈자리였다. 매일 아침 문을 열기가 무섭게 빵집을 찾아 ‘지훈 씨, 오늘 호밀빵 나왔나?’ 하시며 따뜻한 미소를 건네던 할머니. 그녀는 늘 똑같은 호밀빵 한 조각과 뜨거운 꿀차 한 잔을 시켜 창가 자리에 앉아 조용히 아침 햇살을 즐기다 가시곤 했다. 할머니의 낡았지만 깨끗한 한복 저고리와 차분한 매무새는 빵집의 풍경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었다.

하지만 지난 사흘간, 옥순 할머니의 발걸음은 뚝 끊겼다. 첫날은 그러려니 했다. 할머니도 몸이 불편하실 때가 있으려니 생각했다. 이튿날은 조금 걱정이 됐다. 그리고 사흘째인 오늘은 왠지 모를 불안감이 지훈의 마음을 짓눌렀다. 수아 역시 할머니의 안부를 걱정하는 눈치였다.

산길을 따라

오후 한때 손님이 뜸해진 틈을 타, 지훈은 막 구워 김이 모락모락 나는 호밀빵 한 덩이를 종이봉투에 조심스레 담았다. “수아 씨, 나 옥순 할머니 댁에 좀 다녀올게. 혹시 무슨 일 있으신가 해서.”
수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훈의 등을 토닥였다. “응, 잘 다녀와. 나도 걱정돼 죽겠네. 따뜻하게 데운 보리차도 한 병 챙겨가.”

지훈은 빵과 보리차를 들고 빵집을 나섰다. 굽이굽이 산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면, 오래된 기와집들 사이로 옥순 할머니의 작은 집이 보였다.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마당은 쓸쓸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할머니의 슬픔

“할머니! 옥순 할머니!”
지훈이 몇 번 부르자, 그제야 안에서 인기척이 났다.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대문이 조금 열리고, 할머니의 창백한 얼굴이 빼꼼 나타났다. 평소의 온화한 미소는 온데간데없고, 깊은 시름이 가득한 눈이었다. 지훈은 깜짝 놀라 할머니의 안색을 살폈다.
“할머니, 괜찮으세요? 며칠 빵집에 안 오셔서 걱정이 돼서요. 이거 막 구운 호밀빵이랑 따뜻한 보리차 좀 가져왔어요.”

할머니는 지훈이 내미는 빵 봉투를 힘없이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어서 들어와. 이렇게 먼 길까지…”라며 작은 목소리로 지훈을 안으로 불렀다. 마루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지훈은 할머니의 눈길이 자꾸만 마루 한쪽에 놓인 낡은 재봉틀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천을 수선하는 일이라면 동네에서 으뜸이었던 할머니의 자랑이자 소일거리였던 재봉틀이었다.

“저 재봉틀이… 그만 망가져 버렸어.”
할머니의 목소리에는 눈물이 섞여 있었다. “내 젊은 날, 돌아간 서방님이 결혼 선물로 사주신 건데… 평생 내 손때가 묻은 건데, 이제 더는 움직이지 않아. 고칠 수가 없대.”
말씀을 이어갈수록 할머니의 눈에는 굵은 눈물이 맺혔다. 재봉틀은 할머니에게 단순히 기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지나간 세월의 흔적이었고, 남편과의 추억이었으며, 할머니가 이웃들에게 작은 도움을 줄 수 있었던 존재의 이유였다. 그것이 망가진 순간, 할머니는 자신이 세상과의 연결고리를 잃어버린 듯한 상실감에 휩싸인 듯했다. 몸이 아픈 것이 아니라, 마음이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던 것이다.

따뜻한 기적의 시작

지훈은 할머니의 재봉틀을 조심스레 살펴보았다. 낡고 오래되었지만, 할머니의 손길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물건이었다. 그의 머릿속에 번뜩 스쳐 지나가는 얼굴이 있었다. 빵집 단골손님 중 한 명인 정우 씨. 그는 오래된 기계나 골동품을 전문으로 수리하는 젊은 기술자였다. 손재주가 뛰어나고 무엇보다 사람의 사연이 깃든 물건을 소중히 다룰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할머니, 혹시 제가 아는 분 중에 이런 오래된 기계를 고치는 분이 있어요. 제가 한 번 여쭤보고 연락드려도 될까요? 할머니께 소중한 물건인데, 이대로 포기하기엔 너무 아쉽잖아요.”
할머니의 눈빛에 아주 희미한 생기가 돌았다. “정말… 정말 그럴 수 있겠니?”
“그럼요! 제가 꼭 연락해 볼게요.”

빵집으로 돌아온 지훈은 수아에게 옥순 할머니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수아는 할머니의 슬픔에 공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에는 이내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정우 씨라면 분명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우리 빵집 손님들도 다 할머니 걱정하시는데… 우리가 할머니께 작은 힘이라도 되어드릴 방법을 찾아야겠어요.”

다음 날 아침, 빵집 한쪽에는 옥순 할머니의 재봉틀 수리를 위한 작은 모금함이 놓였다. 지훈과 수아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정성스럽게 적어 모금함 옆에 두었다. 그 글에는 할머니가 동네 사람들의 옷을 고쳐주며 얼마나 많은 따뜻한 마음을 나누었는지, 재봉틀이 할머니에게 어떤 의미였는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빵집을 찾은 손님들은 사연을 읽고는 저마다 작은 성의를 보탰다. 빵값을 깎아주려는 수아에게 “됐어요, 할머니 재봉틀 고치는 데 보태세요.”라며 돈을 더 내는 이들도 있었다. 어린아이들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용돈을 모금함에 넣었다. 빵집은 어느새 옥순 할머니를 위한 따뜻한 온기로 가득 채워졌다. 산모퉁이 작은 빵집에서 시작된, 작지만 위대한 기적이 또 한 번 시작되고 있었다. 그것은 갓 구운 빵처럼 따스하고, 사람들의 마음처럼 부드러운 기적이었다. 할머니의 낡은 재봉틀에 새 생명을 불어넣고, 그녀의 마음에 다시 온기를 가져다줄, 바로 그 기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