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사진관에서 생긴 일 – 제123화

붉은 실타래

어둠이 깔린 늦은 밤, 오래된 사진관 ‘추억의 빛’은 낡은 필름 감는 기계의 규칙적인 윙윙거림과 현상액 냄새로 가득했다. 지우는 먼지 앉은 작업대 위에 엎드려 조명 아래 빛바랜 사진 한 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흑백 사진 속에는 앳된 얼굴의 할아버지 정운과 그의 옆에 서 있는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젊은 여인, 그리고 그 여인의 품에 안긴 개구쟁이 같은 아이가 담겨 있었다. 오랫동안 지우는 이 사진이 자신의 할머니와 아버지의 젊은 시절 모습이라고 믿어왔다.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설명할 수 없는 이질감이 늘 그녀의 마음 한구석을 맴돌았다.

정적을 깨고 오래된 문 위 작은 종소리가 맑게 울렸다. 늦은 시간, 뜻밖의 손님이었다. 지우는 고개를 들고 문 쪽을 바라보았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단정히 빗어 넘기고 고풍스러운 코트를 입은 백발의 노부인이 문간에 서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깊고 아련한 추억으로 가득 차 있는 듯했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혹시 이 사진관에서 아주 오래전, 앨범 작업을 하셨던 기록이 있을까요?” 노부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어딘가 간절함이 묻어났다. 그녀는 낡은 가죽 지갑에서 빛바랜 신문 스크랩 조각 하나를 꺼내 지우에게 건넸다. ‘추억의 빛, 그대와 나의 영원한 순간을 담다.’ 아주 오래전 신문에 실렸던 사진관 광고였다.

지우는 스크랩을 받아 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할아버지께서 운영하시던 곳이라 기록이 남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진을 찾으시는지요?”

노부인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정운이라는 사진사 분이셨죠. 아주 재능 있는 분이셨어요. 저는… 그때 제 아들이 백일 사진을 찍었었는데, 그 앨범을 찾고 싶어서요. 혹시, ‘미란’이라는 이름으로 맡겨진 앨범이 있었을까요?”

그 이름에 지우는 순간 숨을 들이켰다. ‘미란’. 그녀가 지금 들여다보고 있던 사진 뒷면에 희미하게 적혀 있던 이름이었다. 지우는 애써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며 다시 작업대로 시선을 돌렸다. 테이블 위, 그 사진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혹시… 이 사진을 찾으시는 걸까요?” 지우는 조심스럽게 사진을 노부인 쪽으로 밀었다. 노부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사진을 집어 들었다. 그녀의 시선은 사진 속 젊은 여인과 아이에게 고정되었다.

“이… 이 사진은….” 노부인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손가락이 사진 속 여인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제… 제가 찾던 앨범에 있던 사진이 맞아요. 그런데 이건….” 그녀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건… 제가 처음 봤던 그 사진 그대로가 아니군요.”

지우는 의아함과 동시에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노부인이 말하는 ‘처음 봤던 사진’과 그녀가 알고 있던 ‘할머니와 할아버지 사진’ 사이에는 어떤 간극이 존재하는 것일까. 지우는 노부인에게 따뜻한 차 한 잔을 건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진이… 어떻게 다른가요?”

노부인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사진을 응시했다. “이 사진 속 여인은… 제가 맞아요. 제가 안고 있는 아이도 제 아들이 맞고요. 그런데… 그런데 제 옆에 서 있는 남자는….” 그녀의 시선이 사진 속 젊은 정운의 얼굴에 멈췄다. “이분은… 정운 씨가 아니었어요. 제가 기억하는 원래 사진 속에서는… 다른 사람이 있었어요.”

지우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할머니가 아니었다니, 게다가 할아버지 옆에 서 있는 사람이 원래는 다른 사람이었다니! 그녀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노부인을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이분은… 제 할아버지 정운 선생님이신데요.”

노부인은 고개를 저었다. “알아요. 제가 기억하는 정운 씨 얼굴과 똑같아요. 하지만… 처음 사진이 나왔을 때, 그 자리에는 제 남편이 서 있었어요. 백일 사진은 남편과 저, 그리고 아들 셋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앨범 속 그 남자의 얼굴이… 이렇게 변해 있었어요.”

노부인의 눈빛은 다시 아련한 슬픔으로 가득 찼다. “그때 저는 너무나 혼란스러웠어요. 남편은… 전쟁터로 떠났고, 얼마 후 전사 통보를 받았죠. 슬픔에 잠겨 살던 어느 날, 우연히 앨범을 다시 열었는데, 남편의 얼굴이 정운 씨 얼굴로 바뀌어 있었던 거예요. 믿을 수 없었지만, 그 사진은 영원히 그렇게 남아버렸죠. 그리고 그 뒤로… 저는 다시는 이 사진관에 오지 못했어요. 마치… 누군가가 저의 기억을 지우려 한 것처럼 느껴져서요.”

지우는 떨리는 손으로 사진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사진 속 정운의 얼굴은 무심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 미소 뒤에 어떤 비밀과 어떤 아픔이 숨겨져 있는 걸까. 그녀의 할아버지 정운은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을까? 그리고 이 사진은 왜, 누구의 손에 의해 변형된 것일까? 아니, 변형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기억처럼 스스로 변한 것일까?

노부인, 미란은 지우의 손에 쥐어진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때, 정운 씨는 저에게 한 마디를 했었죠. ‘사진은… 때로는 보여주고 싶지 않은 진실을 품고 있기도 하고, 때로는 간절히 바라는 거짓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어떤 사진이든,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마음으로 찍는 것이지요.’라고요. 이제야 그 말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아요.”

지우는 텅 빈 사진관에 홀로 남겨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눈앞의 사진은 단순한 종이 조각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간과 기억, 그리고 감춰진 사랑과 슬픔이 얽힌 거대한 붉은 실타래였다. 실타래의 끝을 잡은 지우는 할아버지 정운의 오래된 비밀 속으로 한 발짝 더 깊이 들어서게 된 것을 직감했다.

다음 이야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