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찾아온 길고양이와의 대화 – 제120화

어스름이 짙게 깔린 초저녁, 미호는 창가에 앉아 멀리 도시의 불빛들이 하나둘 깨어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낡은 창틀에 기댄 손가락 끝으로 차가운 바람이 스며들었지만, 그녀의 마음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매미 소리가 잦아들고 귀뚜라미 소리가 간간이 들려오는 것을 보니, 여름의 끝자락이 제법 깊어진 모양이었다. 시간은 언제나 그렇게, 누군가의 동의 없이도 쉼 없이 흘러갔다.

그때였다. 발소리 하나 없이, 그림자처럼 스르륵 나타난 고양이가 미호의 무릎 위로 조용히 뛰어올랐다. 부드럽고 따스한 온기가 곧장 그녀의 심장으로 전해지는 듯했다. 그림자, 언제나 그녀 곁을 지키는 존재. 어느새 녀석의 털은 가을을 맞아 한층 풍성해진 듯 보였다. 미호는 그림자의 등을 길게 쓸어내렸다. 녀석은 만족스러운 듯 눈을 가늘게 뜨며 작게 골골거렸다.

“또 이렇게, 계절이 바뀌려나 봐. 우리 만난 지 벌써 몇 번의 계절이 지나간 거지, 그림자야?”

미호는 녀석의 보드라운 털에 얼굴을 묻으며 속삭였다. 그림자는 고개를 들어 미호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녀석의 맑은 호박색 눈동자 속에는 수많은 이야기와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이 담겨 있는 듯했다. 미호는 녀석의 눈빛에서 ‘셀 수 없이 많지’라는 대답을 읽어냈다. 그들의 대화는 언제나 그랬다. 언어의 장벽을 넘어선, 영혼과 영혼이 맞닿는 교감.

미호는 그림자를 품에 안고 천천히 몸을 돌려 실내를 둘러보았다. 작은 거실, 낡았지만 아늑한 가구들, 그리고 창밖으로 펼쳐지는 익숙한 풍경. 그 모든 것들이 그녀와 그림자가 함께 만들어온 시간의 흔적이었다. 처음 그림자가 그녀의 삶에 불쑥 찾아왔던 날을 기억했다. 낯설고 경계심 가득했던 눈빛, 그러나 그 안에 숨겨진 깊은 외로움을 미호는 알아보았다. 그리고 지금, 그림자는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그녀의 품에 안겨 있었다.

“가끔 생각해. 네가 없었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미호는 문득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말했다. 그림자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미묘한 떨림을 감지했는지, 앞발로 그녀의 팔을 톡톡 건드렸다. 마치 ‘괜찮아, 내가 있잖아’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 작은 몸짓 하나에 미호의 눈가에 뜨거운 것이 고였다. 그들은 함께 수많은 비바람을 견뎌왔다. 미호가 절망의 늪에 빠졌을 때, 그림자는 침묵 속에서 그녀의 곁을 지키며 존재 자체로 위로가 되어주었다. 녀석의 온기, 녀석의 고요한 숨소리, 녀석의 변함없는 시선이 그녀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한 번은 아주 추운 겨울날이었다. 미호는 뜻밖의 이별로 모든 것을 잃은 듯한 상실감에 휩싸여 며칠 밤낮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누워만 있었다. 그때 그림자는 녀석이 잡아온 작은 먹이를 미호의 발치에 조용히 두고 떠나지 않았다. 차가운 콧잔등으로 그녀의 뺨을 비비고, 따뜻한 몸으로 그녀의 옆구리에 바싹 붙어 온기를 나누어 주었다. 그 순간, 미호는 비로소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림자가 세상의 모든 슬픔을 홀로 짊어진 자신을 위해, 기꺼이 곁을 내어주고 있다는 것을. 그 기억은 언제나 미호의 마음속에 따뜻한 불씨로 남아 있었다.

“나도 네 덕분에 많이 변했어, 그림자야.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되고, 듣지 못했던 소리들을 듣게 되었지. 세상이 너와 함께 훨씬 더 다채로워졌어.”

미호는 그림자의 귀 뒤를 부드럽게 긁어주었다. 그림자는 눈을 감고 미호의 손길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녀석의 편안한 모습에 미호의 마음에도 잔잔한 행복감이 밀려왔다. 그때, 멀리서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가 고요를 깨뜨렸다. 창밖을 내려다보니, 낡은 아파트 단지 뒤편으로 희미한 불빛이 번쩍이는 것이 보였다. 며칠 전부터 들리던, 재개발에 대한 논의가 다시 시작된 모양이었다. 미호는 한숨을 쉬었다. 이곳은 그림자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자, 그들의 소중한 보금자리였다. 변화는 언제나 예측 불가능하고, 때로는 두려운 것이었다.

그림자는 사이렌 소리에 잠깐 귀를 쫑긋하더니, 이내 다시 미호의 품에 고개를 파묻었다. 녀석의 털 속에서 느껴지는 심장 박동은 한결같이 평온했다. 마치 어떤 변화가 닥쳐오든, 자신은 항상 미호의 곁에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미호는 그림자를 더욱 꼭 끌어안았다. 녀석의 털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냄새, 녀석의 온기. 이 모든 것이 미호에게는 세상의 어떤 불안함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평화였다.

“응, 맞아. 네가 있잖아. 무슨 일이 생겨도, 우리 함께라면 괜찮을 거야.”

미호는 그림자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중얼거렸다. 그림자는 작게 코를 킁킁거리더니, 미호의 손을 핥았다. 그들의 대화는 말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 어떤 언어보다도 깊고 진실했다. 밤은 더욱 깊어지고, 도시의 불빛은 더욱 선명해졌다. 그러나 미호와 그림자가 함께 있는 작은 공간만큼은 변함없이 따뜻하고 안전했다. 그들의 이야기는, 계절이 바뀌고 세상이 변해도, 언제나 그 자리에서 계속될 터였다. 새로운 계절과 함께 찾아올 알 수 없는 미래 속에서도, 그들의 눈빛은 서로를 향해 변함없이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