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훈은 낡은 철문을 열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늦은 밤의 정적을 갈랐다. 가로등 불빛조차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오래된 양옥집은 마치 폐허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서연이 어릴 적 잠시 머물렀다는 외삼촌 댁. 수십 년간 비어있었다는 소문에 지훈은 반신반의했지만, 희미한 단서 하나를 쫓아 여기까지 왔다.
발길을 옮길 때마다 마른 나뭇잎 밟히는 소리가 바스락거렸다. 흙먼지가 쌓인 현관문을 열자 곰팡이 냄새와 오래된 나무 냄새가 뒤섞인 공기가 지훈의 폐부를 찔렀다. 손전등 불빛이 닿는 곳마다 낡은 가구들의 그림자가 기괴하게 늘어났다. 거미줄과 먼지가 시간을 멈춰 세운 듯했다. 126번째 발걸음, 126번째 희망, 아니 어쩌면 126번째 좌절의 예감이었다.
“서연아…”
낮게 읊조린 이름이 공허한 공간을 맴돌다 사라졌다. 지훈은 손전등을 들고 조심스럽게 집 안으로 들어섰다. 서재였을 법한 방, 먼지 쌓인 책장, 깨진 창문. 바람이 스며들어 낡은 커튼을 흔들었다. 그 속에서 그는 낯설지 않은 향기를 맡는 듯했다. 비록 모든 것이 빛바래고 훼손되었지만, 서연의 흔적을 찾고자 하는 그의 집념은 여전히 뜨거웠다.
그녀가 여기에 무엇을 남겼을까. 어린 시절의 기억? 혹은 어른이 된 후 잠시 들렀던 흔적? 지훈은 벽 한쪽의 낡은 책장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책들은 듬성듬성 비어있었고, 남은 책들은 습기에 절어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때, 손전등 불빛이 책장 모서리의 미세한 틈새를 비췄다. 다른 나무와는 다르게, 그 부분만 매끄러운 홈이 파여 있었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지훈은 그곳에 손가락을 넣어보았다. 예상대로, 그 홈은 움직였다. 뻑뻑하게 끼어있던 나무판을 조심스럽게 당기자, 덜컥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틈이 생겼다. 그 안에는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게 보관된, 낡은 나무 상자가 놓여 있었다. 오래된 장인의 손길이 느껴지는 섬세한 조각이 상자를 뒤덮고 있었다. 누가 감히 이런 상자를, 이렇게 완벽하게 숨겨 놓았을까.
상자를 꺼내 들자 손바닥에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지훈은 상자를 끌어안고 조심스럽게 마루 한가운데 앉았다. 숨을 고르고, 마음을 다스렸다. 이 작은 상자 안에 서연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그리고 동시에 그 기대가 산산이 부서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그의 온몸을 짓눌렀다.
상자 뚜껑을 열자, 오래된 종이 냄새가 확 풍겨 나왔다. 안에는 얇은 솜에 싸인 작은 노트 한 권과, 말라붙은 꽃잎 한 장, 그리고 빛바랜 사진 한 장이 들어있었다. 지훈은 떨리는 손으로 노트를 꺼냈다. 낡은 가죽 커버, 익숙한 글씨체. 서연의 것이었다.
‘2007년 7월 12일. 삼촌 댁에 잠시 머무르기로 했다. 답답하고 두렵다. 이곳에 나만의 비밀 장소를 만들었다. 아무도 찾지 못할 곳에, 나의 슬픔과 비밀을 숨겨두려고 한다. 그 아이는 너무나 착하고, 나에게 과분한 사람이다. 이 모든 것을 알게 되면… 날 용서할 수 있을까.’
지훈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2007년. 그들이 가장 행복했던 시기. 그리고 서연이 갑자기 사라지기 직전의 시간이었다. 노트는 한 장 한 장, 서연의 불안감과 죄책감을 생생하게 담고 있었다. 그녀가 어떤 비밀을 품고 있었는지, 왜 그를 떠나야만 했는지에 대한 실마리가 그 안에 있었다. 그녀의 글씨는 절망과 체념으로 점철되어 있었고, 그 속에서 지훈은 자신을 향한 깊은 미안함을 읽었다.
노트의 마지막 페이지는 그녀의 글씨가 아니라, 마치 다른 사람이 쓴 듯한 필체로 짧게 덧붙여져 있었다. 먹물 펜으로 쓰인 그 글씨는 서연의 것보다 훨씬 힘 있고 단호했다.
‘그녀는 이곳에 없다. 이제 당신은 진실을 알게 될 것이다. 서연은 선택했고, 그 선택의 대가를 치르는 중이다. 모든 것은 운명이었다.’
지훈의 손에서 노트가 떨어졌다. 몸을 덮쳐오는 한기, 그리고 격렬한 혼란. 이 글은 누가 쓴 것인가? 서연이 이 상자를 숨긴 뒤, 누군가 이곳에 다시 와서 이 글을 남겼다는 말인가? 그리고 ‘선택’과 ‘대가’라니? 그 모든 것이 지훈을 둘러싼 안개처럼 느껴졌다.
빛바랜 사진을 들었다. 사진 속에는 앳된 서연의 모습과, 그녀의 옆에 서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흐릿하게 찍혀 얼굴을 정확히 알아볼 수 없었지만, 낯선 존재감은 분명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서연의 글씨로 작게 쓰여 있었다. ‘나의 죄.’
“서연아… 대체 무슨…!”
지훈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순간, 낡은 집의 창문 밖에서 섬뜩한 그림자가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뒤이어, 현관문이 삐걱이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이 집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지훈은 본능적으로 상자를 품에 안고 몸을 웅크렸다. 어둠 속에서,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이 모든 진실의 조각들이, 이제야 비로소 하나의 거대한 퍼즐을 이루려 하고 있었다.
그는 깨달았다. 지난 10년간의 추적은,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했음을. 서연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감춰져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예감이, 그의 온몸을 옥죄었다.
